책이 너무 어려워서 몇 번을 반복해서 읽었다. 신학도의 눈으로 서평을 하려기엔 내가 가진 지식이 한없이 부족하다. 그래서 이전에 개인적으로 R.C 스프로울의 언약이라는 책을 읽고 적은 독서노트와 구약을 구속사 관점으로 묵상하며 정리했던 노트를 참고하여 마이클 호튼의 언약 신학이라는 책의 독서 감상문을 적어봤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준비하신 뒤 인간을 창조하셨다. 유비된 존재로.. 언약들을 살펴보면서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를 주는 것을 기뻐하시는 하나님을 묵상할 수 있었다. 하나님을 창조주로 인정하는 것이 축복인데 하나님처럼 되고 싶어 원죄가 들어왔다. 하나님은 당신의 선하신 성품을 주시기를 기뻐하셨는데 하나님을 떠나는 것, 대적하는 것, 내 뜻대로 사는 것, 내 판단은 복을 걷어 차는 것과 같다. 호튼에게 언약적인 관계란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본질적인 것 자체이다. 성경에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가 기록되어있는데 이 관계 자체가 언약인 것이다(언약적 피조물로서 창조). 하나님께서 오래전 이스라엘 백성과 맺은 계약이 옛 언약이고 하나님께서 교회와 맺으신 계약이 새 언약이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하나님과 새 언약을 맺은 사람이다. 그렇다면 언약은 성경 전체를 꿰는 줄이라고 생각한다. 구약 39권 전체를 묶어 옛 언약이라 부르고 신약 27권 전체를 묶어서 새 언약이라 부른다. 그렇기 때문에 언약의 관점으로 성경을 보아야 성경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맺기 원한다면 하나님과 내가 맺은 계약의 내용을 알아야 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다. 하나님은 그분이 맺으신 계약대로 우리를 대하신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행하시고 어떻게 행할 것인가 알려면 이 계약을 들여다보아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경을 읽는다는 것은 그 계약서를 읽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마이클 호튼의 언약 신학 1장을 다 읽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 필요를 위해 내가 자녀를 가졌나? 아니다. 자녀는 도리어 나를 수고롭게 만든다. 그러나 나를 수고하게 하는 자녀로 인해 기쁨이 있다. 그렇다면 전능하신 하나님께 ‘나’ 하나가 어떤 존재일까? 내 자녀 중 하나를 잃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다. 하나님도 ‘나’ 하나를 잃는 것은 큰 슬픔일 것이다. 내 영혼을 그렇게 귀하게 여기신다. 하나님은 하나님 한분만으로도 충분하신 분이신데 인간을 창조하시고 언약을 맺으셨다. 다 헤아릴 순 없지만 자녀를 낳고 기르며 수고하여 기르는 그것이 얼마나 큰 기쁨이 되는지 생각하면 하나님 마음도 그렇지 않을까. 언약 신학에 있어서 호튼은 사람이 타락 이전은 물론 타락 이후에도 언약적인 존재로 남는다는 것을 강조한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자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시므로 인간과 특별한 관계를 세우셨는데 이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행동이셨다. 인간을 창조하신 것도, 인간과 언약을 맺으신 것도 모두 주권적으로 행해졌다. 그러나 인간에게 주어진 것이 있다. 그것이 자유의지였다. 자유의지는 선택할 수 있는 힘이다. 창조 언약이 우리에게 중요한 이유는 아담에게 주어진 이 언약이 아담 한 사람에 대한 언약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담은 인류를 뜻하고 인류를 대표한다. 즉 호튼은 창조 언약과 아담 언약을 동일한 것으로 보았다. 창조 때에 아담에게 주어진 창조 언약은 행위 언약이다. 이런 의미에서 타락한 후에 저주 속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약속은 은혜 언약의 시작으로서 아담 언약으로 구분할 수는 있다. 율법은 하나님 자신의 도덕적 성품의 반영이다(선하신 성품). 또한 호튼은 유비를 강조한다(동등성). 하나님은 유비적인 면에서 자신의 인간 파트너와 함께 자신의 도덕적 성품을 나누려고 결정하셨다. 성경에서 율법과 사랑은 손에 손을 맞잡고 간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이러한 율법은 하나님 마음대로 하시려는 것과는 관계가 멀며, 하나님 자신의 본성 그 자체의 표현이다. 율법은 비인격적인 법조문이 아니며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선하 심의 구체적인 계시다.
하나님은 창조주시고 우리라는 자신의 창조물과는 완전히 구별되시는 분이시다. 인간이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과 우리에게 공통된 것이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와 언약을 맺어 우리의 하나님이 되어주셨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구속사를 계획하시고 시행하시는 하나님께서 보실 때 세상은 어떤 상태였나. 아담의 첫 아이 가인은 동생을 살해하고 세상은 힘 있는 자가 왕 노릇 하는 악으로 가득 찼다. 하나님께서는 뱀에게 너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이 원수가 되게 하신다고 하셨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 세상은 사단에 속한 자들과 여자의 후손에 속한 자들의 서로 대적하는 것이 된다. 셋 계 열은 가인 계열과 섞이면 안 된다. 여자의 후손을 이어간 것이 바로 노아였다. 성경에는 그를 세상에 의인이고 완전한 자라고 기록하고 있다. 어떻게 악한 세상에서 의인으로 살 수 있었을까?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믿음으로 하나님과 동행하게 하셨다. 노아를 통해 하나님의 언약이 계속 이어지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즉 노아는 죄가 없는 사람이 아니라 여호와께 은혜를 입은 자인 것이다. 노아가 어떻게 행하느냐에 달려있지 않은, 언약의 종에게 베풀어진 것. 인간의 타락으로 사람들은 다 물속에 잠겼다. 창조하셨던 때의 땅은 이제 없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당신의 언약을 노아를 통해 계속해 가신다. 죄와 저주의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고 마지막 심판 날까지. 노아의 순종은 메시아인 예수님의 순종의 모형, 예표이다.
아브라함언약에서 언약 비준 의식으로서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가는 것은 계약의 양측이 생명을 걸고 약속을 지킬 것을 맹세하는 것이며 어길 시 이 고기와 같이 본인이 쪼개질 것이라는 의미이다. 그런데 그 고기 사이로 지나간 것은 아브라함이 아니라 화로와 횃불, 하나님이셨다. 그 약속은 일방적이었고 또한 하나님은 자신을 가리켜 맹세하셨다. 호튼은 이 의식이 오직 하나님이 약속을 완수할 모든 책임과 약속 파기의 모든 저주를 떠맡는 것을 나타내고, 노아의 무지개와 같이 자기 저주적인 맹세라고 여긴다. 하나님은 엄숙한 피의 맹세로서 인간과 자신을 결속시키는데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약속을 이행하셔야만 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자손, 땅, 복을 약속하셨다. 어느 것 하나 그의 힘으로 얻을 수 있었던 것이 없다. 아내는 불임이었고 땅은 가나안 족속이 있었고 그의 조카 롯은 자신이 보기에 좋은 땅으로 떠났다. 그가 천하 만민에게 복을 주는 자가 되리라는 것은 몇 천 년이 지나 그의 후손으로 온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질 것이다. 아브라함의 순종 또한 메시아인 예수님의 순종의 모형, 예표이다. 호튼은 순종이 언약의 약속에 대한 필수적인 반응이고 언약의 복을 누리는 도구라는 차원에서 은혜 언약의 조건은 아니지만 합당한 반응이라고 한다. 그렇기에 아브라함의 삶은 모든 믿는 자의 표본이 되고 우리가 믿음으로 살아감에도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는 소망을 준다. 실제로 나에게는 하나님의 모든 약속의 성취 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있다. 삼위 하나님의 온전한 관계 속에 나를 불러주신 것만으로도 은혜인데.. 창세전부터 약속하신 그 구속을 은혜로 행하시고 그 속에 들어가게 하셨다. 사역을 하며 한 번씩 ‘언제까지 이렇게 버겁게 살아야 하지? 꼭 이렇게 살아야 하나?’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 얼마나 많이 흔들렸었나 모르겠다. 언약 백성의 정체성을 가져야 한다. 한 사람의 변화가 큰 민족을 이뤘다. 하나님 나라를 기억하자. 하나님께서 언약하신 일들을 이루실 것이라는 약속을 믿음으로 이 길을 계속 걸어가자. 크로노스의 모든 일상을 ‘때가 차매’ 카이로스로 이끄실 것이다. 인간의 역사 속에 들어오셔서 크로노스의 모든 순간을 카이로스를 향해 가도록 하셨다. 주신 이 길은 결코 우연이 아님을 기억해야 한다.
호튼은 순종에 대해서 은혜로 풍성하게 상 받은 아브라함이나 다윗에게서도 행위의 원리가 작용하는 일종의 언약 보증인을 찾으려 한다. 다윗은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께서 영원히 거할 집을 세우기 원했지만 하나님은 다윗을 통해 영원한 왕조를 세울 것을 약속하셨다. 하나님은 다윗이나 다윗 후손의 행위와 상관없이, 다윗의 왕위에 앉을 후손을 일방적이고 무조건적으로 보존하시겠다고 하셨다. 호튼은 시내산 언약은 이스라엘의 집단 불순종 때문에 압제당하고 포로가 된 조건적인 약속인데 다윗 언약은 하사 언약으로 무조건적이라고 주장한다. 약속의 절대적 성취를 의미하는 것이다.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시내산 언약은 순종하냐 안 하냐에 따라 축복과 저주가 주어지는데 우리가 시내산 언약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함을 알려주는 표지판이 된다. 이스라엘의 불순종으로 포로 되었던 것이 하나님의 언약이 끝났다고 볼 수 없다. 아브라함 언약을 계속해서 성취해 가시며 구속의 계획을 실행하신다는 것을 다윗 언약을 통해 보여주신다. 다윗은 양치기였고 집안의 막내였는데 하나님께서 왕으로 택하신다. 야곱을 통해 유다 지파에서 왕이 나올 것이라는 당신의 말씀을 이루신 것이다. 다윗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것이다. 다윗의 후손이 이스라엘 나라의 왕위에 오르는 것은 중단되어도 다윗 언약은 끝난 것이 아니다.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영원한 통치를 목표로 하기 때문이다.
모든 언약들이 예수님을 향하고 있다. 호튼은 시내 산 언약은 새 언약과 원리적으로 다르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순종하는 행위에 따라 복과 저주가 나뉘는 시내산 언약조차도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에 의한 구원(출애굽)을 전제로 하고 있지 않나? 다른 것은 분명히 맞지만 어떤 맥락으로 말하는 것인지 헷갈린다. 이스라엘 국가 안에 희생 제사, 속죄일, 절기 이런 제도들을 통해 백성들이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 제시되었었는데 그것들은 이제 예수님을 통해 단번에 성취되고 대체되었다. 예수님은 옛 언약의 성취자인 것이다. 예레미야 31장은 새 언약의 비전을 보여준다. 이스라엘 자손은 비록 시내 산에서 맺은 언약은 깨뜨렸지만 하나님께서 새로운 언약을 약속하시는데 아브라함 언약이 마침내 성취될 것이다. 호튼은 시내산 언약 자체는 은혜의 원리와 대조되는 행위의 원리에 의해서 좌우된다고 한다. 시내산 언약 자체는 율법이고 약속이나 복음과는 정반대 된다고 말한다.
아브라함이 아들을 얻은 것도,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을 얻은 것도, 불순종하는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끊임없이 돌이키신 것도, 바벨론으로 보내신 이스라엘 백성을 예루살렘으로 다시 부르신 것도, 예수님께서 오시고 십자가를 지신 것도, 내가 구원받은 것도 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언약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역사 속에서 이 언약들을 성취하셨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맹세하셨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조상에게 맹세하셨고, 하나님께서 그의 종 다윗에게 언약을 주셨고,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언약을 주셨고, 하나님의 영원한 언약이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2천 년 전에 갑자기 나타나서 십자가를 지신 것이 아니다. 구약의 하나님의 백성들이 자꾸 실패해서 대안책으로 보내신 것도 아니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오직 하나의 구원의 길이신 것이다. 점진적으로 하나씩 하나씩 계획하신 구속사를 완성으로 이끄시는 것이다.
호튼은 이스라엘의 이야기는 아담의 창조와 시험과 타락의 이야기의 되풀이이며 최초 언약의 압축판이고 이스라엘의 시험은 보편적인 인류의 언약적 시험의 지역적이고 한정적인 반복이라고 한다. 시내 산 언약 아래의 이스라엘과 창조 언약 아래의 아담 사이에도, 그리고 시내 산 언약 아래의 이스라엘과 그리스도 사이에도 행위 언약적 원리의 연속성이 존재한다. 집단적 아담. 이스라엘도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라는 것이다. 시내산 언약 뒤에 아브라함 언약의 사건들이 놓인다. 아브라함 언약이 부분적 성취가 출애굽 때 이루어졌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는 율법이 전부가 아니다.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하신 것은 이스라엘이 가진 어떤 행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 때문이다. 은혜의 문제인 것이다. 이스라엘 사람이 하나님 보시기에 의롭다 함을 받는 것도 오직 은혜로, 아브라함 언약을 따라서 된 것이다. 호튼은 시내산 언약은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의무가 있고 그 의무이행의 결과에 따른 축복과 저주가 있는 종주권 조약이라고 한다. 언약적 질서가 있는 것이다. 시내 산 언약 비준 의식과 시내 산 언약의 피는 시내 산 언약이 행위의 원리에 의해서 좌우되는 율법 언약이 아니라 새 언약과 실체에 있어서 동일한 은혜 언약이라는 증거가 될 것이다. 하나님의 언약은 피로 맺어졌다. 고대 이는 근동 지방에서 언약을 세우는 풍습을 알 때 이해하기가 쉽다. 왕과 분봉왕 사이와 같이 충성이 요구되는 관계에 맹세의 의식으로 황소를 잡아 중간을 쪼개어 벌려 놓은 후 언약의 당사자들은 그 사이를 지나갔다. 이것은 둘 중 한 사람이라도 약속을 파기하면 신에게 이 황소처럼 처참한 징벌을 받겠다는 의미이다(성천과 언약-김남준). 나는 예수님을 믿은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이런 생각을 했었다. 예수님의 보혈이 필요하면 손가락에 피를 조금 내서 그걸로 대신하면 될 텐데 왜 물과 피를 다 쏟으셨을까, 왜 그렇게까지 힘드셔야 했을까. 바로 나에게 생명을 아낌없이 쏟으셨다는 의미인 것을 나중에야 깨달았다. 피의 약정이란 말은 피 흘림이 없이는 죄 사함도 없다는 히브리서 9장 22절의 말씀과도 부합된다. 성경에 나타난 피의 의미는 잔인하거나 살벌해서가 아니라 [생명]을 상징하기 때문에 중요한 것이다(계약 신학과 그리스도-팔머 로벗슨_네이버 검색) 그렇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약속을 파기한 자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와 징벌을 보여주며 동시에 스스로는 이것을 회복시킬 능력이 없는 우리를 위해 예수님을 통해 물과 피를 쏟게 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준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언약의 죽음이다.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 26:28) 언약은 피로 맺어졌다. 게다가 쌍방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세우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세우신 변함없는 약속을 신뢰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세우시고 하나님이 지키신다. 그리고 하나님은 자신의 생명을 두고도 맹세하신다.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하나님께서 언약을 통해 밝히신 뜻은 ‘나는 너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이다. 모든 언약은 각각 독립적이지 않다. 먼저 세워진 언약에 기초해서 이끄신다. 세상 나라 속에 하나님 나라를 세우시기 위해 첫 번 째 국민으로 아브라함과 언약을 세우셔서 인간들을 하나님께로 이끄신다. 하나님은 언약대로 아브라함의 후손들을 부르시고 그 언약의 기초 위에 시내산 언약을 맺으시고 백성들을 이끄셨다. 다윗의 언약은 이 아브라함 언약과 시내산 언약을 기초로 한다. 약속의 땅에 하나님의 왕권이 수립된 것을 상징하는 것이 다윗 시대다. 다윗 시대의 역사도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의 땅과 직접적으로 연관된다(계약 신학과 그리스도-팔머 로벗슨_네이버 검색). 하나님은 이 언약들을 세우실 때마다 끊임없이 너희는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의 하나님이 되리라는 말씀을 하셨다.
“그는 그의 언약 곧 천 대에 걸쳐 명령하신 말씀을 영원히 기억하셨으니 이것은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이고 이삭에게 하신 맹세이며 야곱에게 세우신 율례 곧 이스라엘에게 하신 영원한 언약이라”(시편 105:8-10) 천 대라는 말이 영원하다는 말의 의미이자 영원한 계승의 의미를 포함하는 것이다. 이 언약은 영원히 지속된다. 이스라엘 백성이 받은 혈통적인 언약의 외형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영적인 언약을 이야기하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가 왜 언약 백성인가? 아브라함과 모세와 다윗에게 하신 하나님의 언약이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졌다. 우리에게 성령님이 주어진 이유도 우리가 아브라함의 약속을 이어받은 언약 백성이라는 증거를 주시기 위해서 일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고 성령님께서 오심으로 증명하셨다. 새 언약은 옛 언약인 아브라함 언약, 시내산 언약, 다윗 언약을 이어받았고 실현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새 언약을 예언한 예레미야는 새 언약의 형태가 모세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율법이 마음에 새겨질 수 있다고 말했다. 에스겔 또한 새 언약을 예언하며 하나님께서 그들 위에 한 목자 곧 그의 종 다윗을 세워 그들 위에 왕이 되게 하실 것이라 했다(겔 34). 이렇게 새 언약은 옛 언약과 연합되어 있으면서 옛 언약을 성취하고 있다. 나 여호와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내 종 다윗은 그들 가운데 왕이 되리라는 말씀은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의 왕이 되심으로 성취되었다. 선지서들은 분명히 하나님의 백성의 경계를 이방인까지 포함하고 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모두를 위해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하나님 백성이 될 수 있게 하셨다.
우리는 우리가 사는 시대의 눈으로 우리 자신을 본다. 예수님을 2천 년 전에 나타난 한 인물이라는 시각으로만 본다. 그래서 예수님의 구원에 감사하면서도 현실의 삶에서 일어나는 어려움, 불공평, 고난, 실패를 이해하지 못한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데 왜 그런 것들을 주시냐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영원한 눈으로 보아야 한다. 하나님은 나를 구원하실 계획을 창조 전에 세워놓으셨으며 약속하셨고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아담~예수님 역사를 주관해 오셨다. 그리고 마침내 성령님을 통해 영원한 하나님의 약속이 내 안에 실현되게 하셨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하나님이 되시기 위해서 장막을 지으셔서 샤 켄 하셨던 것처럼 이제 하나님의 장막을 치신 곳이 구원받은 ‘나’에게다. 하나님께서는 다른 사람들도 이렇게 부르기 위해서 심판 날까지 하나님의 언약을 성취해 가실 것이다. 새 하늘과 새 땅은 이것의 완성일 것이다.
하나님의 구속사 관점으로 창조시대에서 족장시대를 살펴보면 언약을 위해 신실하게 일하시는 하나님을 묵상할 수 있다. 창조시대에는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창 3:15)은 여자의 후손이 와서 인간을 죄에 빠뜨린 사탄을 심판하고 승리하신다는 약속이다. 이 원복음에 담긴 세 가지 의미는 인간으로 오실 메시아, 고난 받으실 메시아, 승리하실 메시아이다. 아담과 하와에게 입혀준 가죽옷이 바로 인간의 죄를 가리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대신 죽으시고 피를 흘리실 것이라는 약속이다.
족장시대에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의 의미는 ‘하나님의 나라’이다. 나라를 이루기 위해 필요한 세 가지 요소가 ‘국민, 땅, 주권’이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자손, 땅, 복’은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한 약속인 것이다. 아브라함 후손인 이스라엘을 통해 가나안 땅에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가 이루어졌지만 하나님이 세우시려는 하나님의 나라는 이스라엘이 전부가 아니었다. 바로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받은 백성들인 우리를 통해 이루어지는 나라다. 하나님께서 천하 만민이 너를 통해 복을 받으리라고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듯이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오신 예수님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복을 받았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모리아산에 이끌었을 때 숫양이 예비돼 있었다. 아브라함이 아버지 하나님을 외아들 이삭이 묵묵히 제물로 드려짐이 순종하신 독생자 예수님을 죽음으로 가는 모리아산이 골고다 언덕을 예 표한다. 요셉도 예수님과 닮은 점이 많다. 요셉이 형제들에게 고난을 받고 구덩이에 던져지고 은 20에 팔리고 보디발의 유혹을 이기고 고난이 하나님의 뜻이었던 것처럼, 예수님은 동족에게 고난을 받으시고 무덤에 묻히시고 은 30에 팔리시고 사탄의 유혹을 이기시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고난을 받으셨다. 요셉이 하나님에 의해 높임을 받았듯이 예수님도 하나님에 의해 높임을 받으신다.
출애굽과 광야 시대에서 유월절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말해준다.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른 집은 열 번째 재앙의 죽임을 당하지 않는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해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우리가 그의 보혈로 구원 받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정복시대에 여리고를 점령하기 전 여호수아는 2명의 정탐꾼을 여리고에 보낸다. 여리고 군사들에게 들킬 위험에 빠졌을 때 라합이라는 여인이 정탐꾼을 숨겨준다. 하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하나님이 참 신이라고 믿고 있었던 여인이다. 여리고 가 함락되었을 때 라합과 그의 가족은 구원을 받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속하게 되는데 이 믿음의 여인이 다윗 왕의 조상이 되고 후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이 된다.
사사시대의 룻 이야기를 보면 룻은 다윗의 조상이 된다. 단일 왕국시대에는 유다 지파의 자손으로서 다윗은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왕이면서 진정한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자이다. 룻기를 통해 우리 대신 죗값을 치르시고 우리의 진정한 기업 무를 자가 되신 예수님을 볼 수 있다. 다윗의 후손으로 온 예수님을 통해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는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진 것이다.
분열 왕국시대에는 북이스라엘도 남유다도 결국 망한다. 다윗의 왕위가 영원하리라던 하나님의 약속은 비록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는 무너졌지만 다윗의 자손으로 참된 왕이 오시기까지 다윗의 자손들은 이어진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왕뿐만 아니라 열방의 왕으로 오셔서 영원한 왕이 되신다. 예수님이 우릴 대신해 십자가 지시고 부활 승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 앉으심으로 영원히 우리를 다스리시는 왕이 되셨다.
포로시대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망하는 중에도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 약속을 주신다. 눈에 보이는 나라는 하나님을 배반하고 망할 지라도 하나님의 약속은 계속 진행되어 결국 아담, 노아, 아브라함, 다윗과 맺은 언약은 바로 새 언약이신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포로 귀환 시대에 이스라엘이 포로로 잡혀갔음에도 하나님은 남은 자들을 부르신다. 성전과 성벽을 재건하는 이유도 참 성전, 참 성벽 되시는 예수님 오실 것을 기다리는 삶을 살게 하기 위해서였다.
마지막으로 침묵 시대 400년은 메시아 오심을 준비하는 시간이었다. 이 메시아에 대해 어떤 사람은 정치적으로만 어떤 사람은 영적으로만 이해해서 혼란이 있었지만 메시아가 오면 잘못된 것을 고치고 회복하리라는 기대감을 가진 것은 공통적이었다. 400년 가까이 선지자가 나타나지 않았다. 이때 참 메시아, 제사장, 선지자, 왕이신 예수님이 오셨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지금 내가 십자가로 인증하신 그 새 언약 아래 있는 자임을 깊이 알아야 한다. 우리는 구원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행위를 믿음으로 그것을 통한 칭의로 시작했다면 현재의 삶도 당연히 이신칭의의 영향 아래 있어야 한다. 호튼의 언약 신학의 설명들이 어려운 단어로 이루어져 사전을 찾아가면서 읽었는데, ‘유비적 존재’라는 것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나를 삼위 하나님 사이의 관계에 상호 대응하는 존재하는 동등성의 기능을 하도록 하셨다. 하나님의 관계의 연장선상에 ‘나’를 놓으셨다. 함께 영광 돌리는 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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