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책 추천> 하나님을 아는 지식_제임스 패커_IVP(내용요약/정리/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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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책 추천> 하나님을 아는 지식_제임스 패커_IVP(내용요약/정리/생각)

by 뀨뀨스토리 2022. 5.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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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하나님에 대한 연구

 하나님이 택한 우리가 연구해야 할 합당한 주제는 하나님, 하나님의 본성이고, 이 주제는 마음을 겸손하게 해 주고 넓혀준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연구는 그리스도에 대한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에 대한 학문이여 영광스러운 삼위일체에 나타나 있는 신성에 대한 지식이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말씀하셨으며 성경은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갖도록 하기 위해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은 세상의 왕이시며, 하나님은 하시는 모든 일에서 완전하심을 보이시고, 자신의 영광을 위해 모든 것을 다스리신다. 하나님은 구세주로서, 믿는 자들을 자녀 삼으시고 합당한 복을 주신다. 하나님은 삼위이시다. 경건함이란 하나님의 계시에 대해 신뢰와 순종, 믿음과 예배, 기도와 찬양, 복종과 섬김으로 반응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을 기억하고 우리는 하나님의 신성, 곧 하나님을 인간과 구분해 주고 창조주와 피조물의 차이점과 간격을 표시해 주는 신성의 특성들을 다루어야 한다. 이는 하나님의 자존하심, 영원하심, 불변하심과 같은 특성이다. 또한 하나님의 능력인 전능하심, 전지 하심, 편재하심을 다루어야 한다.

 신학적 지식 자체를 목적으로 하여 지식을 얻는 일에 몰두하게 되면 자기만족 상태에 빠지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분명한 동기와 목적이 있어야 한다. 그것은 내가 이러한 것들에 몰두하는 궁극적인 목표가 무엇인가, 그 지식을 가지고 무엇을 하려고 하는가에 대한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연구해야 한다.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지식을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바꾸려면, 하나님에 대해 배운 각각의 진리를 하나님 앞에서 묵상하는 내용으로 바꾸어 하나님을 향한 기도와 찬양으로 이어지도록 하는 것이다.   

 

 2) 자기의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

 사람들은 자신이 체험을 통하여 하나님을 안다고 말하지만 정작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은 마음속으로 은밀히 거짓되고 과장된 생각을 하지 않는다. 

 우리는 하나님을 많이 알지 못하면서도 하나님에 대해서는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을 많이 알지 못하면서도 경건에 대해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 것과 단지 하나님에 대해 아는 것의 차이를 좀 더 명확하게 직면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엄청난 정력을 가지고 있고 기도로서 표현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한 위대한 생각들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위한 담대함을 보여준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은 하나님 안에서 커다란 만족을 얻는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원한다면 두 단계를 거쳐야 한다. 먼저 우리는 자신에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얼마나 부족한가를 인식해야 한다. 그리고 둘째로 구세주를 찾아야만 한다. 우리가 마음을 다해서 예수님을 찾으면 분명히 그분을 찾게 되리라는 것이 예수님의 약속이다. 

 

 3) 아는 것과 아신 바 되는 것

 우리가 창조된 것은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이다. 우리가 세워야 하는 목표는 하나님을 아는 목표이다. 이 땅에서 해야 할 주된 일이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면 저절로 자기 위치를 찾게 된다.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해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을 아는 활동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하나님의 말씀과 사역이 드러내는 하나님의 본질과 특성을 주목하고, 하나님의 초청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이 명하시는 일을 행하고, 하나님이 당신에게 가까이 오셔서 신적 교제로 이끌어들인 것에서 나타내 보이시는 사랑을 인식하고 그것을 기뻐하는 것이다.

 성경에는 아들이 아버지를 아는 것처럼 아내가 남편을 아는 것처럼 신하가 왕을 아는 것처럼 양이 목자를 아는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고 말한다. 이것은 모두 아는 대상을 바라보고 그대상은 아는 자에게 복지에 대해 책임을 지는 것이다. 바로 예수님을 아는 것도 이것과 같다. 누구든지 예수님이 육신을 가지셨던 시절에 그분의 제자들이 누렸던 것과 같은 관계를 누릴 수 있다. 예수님을 아는 것은 금세와 내세에서 그분에 의해 죄와 죄책과 사망으로부터 구원받는 것이다.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란 (1) 하나님을 아는 것은 인격적인 교제이다. (2) 하나님을 아는 것은 인격적으로 관련되는 일이다. 그것은 지성과 의지와 감정이 관련된다. (3) 하나님을 아는 것은 은혜이다. 그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께 주도권이 있는 관계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하나님을 안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분이 나를 아신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나의 모든 것을 아시며 그리고 나를 사랑하는 분으로 사시는 분이시다.

 

 4) 오직 참되신 하나님

 찰스 핫지는 거짓 신들을 숭배하는 우상 숭배뿐만 아니라 형상을 가지고 참되신 하나님을 숭배하는 우상 숭배의 원리를 지적하고 있다. 즉 예배의 방식에 대해 다루고 있는 것이다. 

 형상들은 하나님의 명예를 손상시킨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기 때문이다. 형상들은 우리를 그릇된 길로 인도한다. 그것들은 하나님에 대한 그릇된 개념들을 전달하기 때문이다. 제2계명 속에는 주물을 녹여서 하나님의 형상을 생각해 내는 것도 금하고 있지만 마음속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생각해 내는 것도 금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들은 하나님을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을 하나의 형상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러한 생각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니고 무지한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자신의 추측과 상상력에 의해 만들어진 하나님에 대한 그릇된 마음속의 형상이라는 우상의 숭배자가 되고 있다. 

 다음으로 소극적으로 이 계명은 하나님의 명예를 잃게 하고 하나님의 진리를 왜곡하는 예배 방식들과 종교적 관행들에 대한 경고를 하고 있다. 그리고 적극적으로 보면 창조주 하나님은 초월하시고 신비 로우시며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상상과 철학적 사고 범주 너머에 계시는 것을 인식하라는 명령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신에 대해 말씀해 주지 않으신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도무지 알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성경을 통하여 말씀하고 계신다. 그러므로 어떤 형상을 만드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하나님으로부터가 아니라 인간적 출처에서 취하는 것이다.

 진리 안에서 참 예배하는가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예수님께 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5) 성육신하신 하나님

 신중한 사람들은 복음을 믿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복음이 다루는 실재가 우리의 이해를 뛰어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속죄, 부활의 문제, 동정녀 탄생, 복음서에서의 예수님의 기적들을 믿는다는 것은 어렵다고 할 수 있다. 이 문제들과 비슷한 다른 문제들로 해서 믿음의 변두리에서 맴돌고 있는 많은 사람은 당혹해한다.

 복음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최고의 신비는 성육신의 성탄절 메시지에 있다. 바로 하나님으로서의 예수님이 사람이 되신 것이다. 하나님의 단일성 안에 여러 위격이 있다는 것과 예수님의 인격 안에서 신성과 인성이 결합되어 있는 것이다. 

 예수님을 경건한 인간으로 생각한다면 그의 생애와 사역에 대해 믿기가 어려우나 예수님이 영원하신 말씀이며 창조 시에 성부의 집행자가 되셔서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신”(히 1:2) 바로 그분이라면 그것은 놀라운 일이 아닌 것이다. 

 성육신 그 자체로서 헤아릴 수 없는 신비이며 더욱이 그것은 신약에 담겨 있는 다른 모든 것이 뜻이 통하도록 만들어준다.

 성육신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신약성경은 그 안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해 하나님께 경배하라고 권한다. 성육신은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는 위대한 행위이기 때문이다. 성육신의 해석은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그것은 사실적으로 "말씀이 육신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요 1:14)로 표현하며 포괄적으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고후 8:9)로 표현한다. 우리는 성육신을 자연의 경이로움 보는 것이 아니라 은혜의 경이로움으로 보아야 한다.

 6) 그가 증거 하실 것이요 

 신성 안에 있는 위격의 복수성에 대해 요한이 가르치는 바는 이것만이 아니라. 요한은 주님이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에 대한 기사에서, 구세주께서 아버지의 집에 그들을 위한 처소를 예비하실 것을 설명한 후에 계속해서 “또 다른 보혜사”를 약속하시는 모습을 이야기한다. 보혜사, 성령의 사역은 그리스도에 관하여 증거 하신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 14:26), 그리스도인에 관하여 증거 하신다.”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 하시나니“(요 8:16)

 (1) 성령이 아니고서는 복음과 신약성경이 있지 않았을 것이다.

 (2) 성령이 아니고서는 믿음과 거듭남도 없을 것이다.

 성령만이 자신의 증거를 통하여 우리의 증거가 진실함을 보증하실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여, 성령께서 그렇게 행해주실 것을 기대하여야 한다.

 

 7) 변치 않으시는 하나님 

 성경에 나와 있는 것과 같은 하나님의 체험과 멀리 떨어져 있는 듯한 느낌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그 연결고리는 바로 하나님이다. 그들과 관계를 맺으셨던 하나님은 우리와도 관계를 맺고 계시는 하나님이다. 성경에 기록된 과거의 사건과 인물들이 현재의 우리의 삶에도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불변성 때문이다. 하나님의 생명은 변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성품은 변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진리는 변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방식은 변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목적은 변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아들은 변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들과 같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과의 교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 믿음으로 사는 것, 하나님의 약속들 위에 서는 것은 구약과 신약시대의 신자들과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도 똑같은 실재다.

 

 8) 하나님의 위엄

 위엄이라는 말은 라틴어에서 온 것으로, 위대함이라는 의미다. 히브리서에서 위엄이라는 말은 하나님이란 말 대신 사용되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경배하고자 하는 그리스도인의 본능은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아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하나님이 자신에게 스스로 붙이신 이름은 엘 샤다이, 곧 전능하신 하나님이며, 하나님의 모든 행동은 이 이름이 선포하는 하나님의 전능을 증명한다. 그러므로, 성경은 첫째로 우리 안의 하나님에 대한 제한을 제거해야 하며, 둘째로, 우리가 크다고 여기는 권세들이나 힘과 하나님을 비교해보라고 말씀하고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분의 위엄을 묵상하는 가운데 이러한 것들을 마음에 새김으로써 새로운 힘을 얻을 때까지 ‘여호와를 앙망하는’ 것이다.

 

 9) 지혜로우신 하나님 

 지혜는 도덕적 선의 실제적인 측면이다. 그러한 지혜는 하나님 안에서만 완전한 모습이 발견된다. 인간의 지혜는 사람이 통제할 수 없는 환경적 요소들에 의해 좌절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서는 무한한 지혜와 무한한 능력이 한데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지혜는 결코 좌절되지 않으며, 이로 인해 하나님은 우리의 완전한 신뢰를 받으시기에 합당한 분이 되신다. 하나님은 무한한 지혜와 능력으로 이 세상에서 모든 사람들이 아무런 문제가 없는 삶을 살도록 하시는 것이 아니라, 각 사람을 죄에서 구해 주시고, 그들의 삶 속에 하나님의 은혜를 나타내시므로,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소망과 사랑 가운데서 하나님 나라의 하나님의 백성으로 변화되도록 하신다.

 

 10) 하나님의 지혜와 우리의 지혜

 성경은 지혜를 발견하려면 (1) 하나님을 공경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2)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법을 배워야 한다. 지혜는 오직 하나님의 계시를 자신에게 적용하는 사람들 안에서 신적으로 역사한다. 

  신적 지혜는 우리가 일상생활의 실제 상황에서 건전한 판단을 할 수 있도록 해준다. 지혜롭게 살이 위해서는 냉정할 정도로 명민하고 현실적으로 인생을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한다. 결코 세상이나 세상에 처한 우리의 삶을 실제 있는 그대로 보지 않는다. 성경에서는 우리가 현실주의적 사람이 되기 위하여 기록된 말씀이 있는데 그것이 전도서이다. 

  전도서는 단순히 설교자라는 의미이다. 이 책은 한 편의 설교로 본문과 그 주제에 대한 해설과 적용으로 되어 있다. 우리가 이전에 가졌던 생각에 대해 아주 철저히 회개하고 자신을 낮추지 않는다면 이후로 우리의 영적 생활 전체가 황폐하게 될지도 모른다.

 지혜란 무엇일까?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12:13) 하나님을 신뢰하고 순종하는 것 경외하는 것, 예배하는 것, 겸손하는 것 등이 곧 지혜이다.

  지혜를 주시는 하나님의 역사는 그의 택하신 목적인 하나님 자신과 인간의 관계를 회복시키고 완전케 하시기 위한 수단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는 하나님의 모든 지식을 공유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지혜 로우시다고 고백하고 시종여일 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하나님을 의뢰하며 하나님을 위해 사는 것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는 가질 수 없는 그런 지식을 추구하기 위한 믿음과 신실함을 소홀히 함으로써 하나님의 지혜로운 목적을 좌절시키지 않도록 해야 한다.

 

 11) 주의 말씀은 진리 니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님은 왕이시고 피조물인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주위에 있는 것들 및 우리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 환경을 결정하고 우리 마음과 정신을 끌기 위해서 말씀하신다. 이 말씀은 주권적인 명령의 형태를 띠며 왕의 토라라고 불린다. 이것은 율법, 약속, 증거로 나눌 수 있다. 하나님이 직접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은 통치의 방편일 뿐 아니라 교제의 방편이다. 왜냐하면 자기 백성과 멀리 떨어져 사는 것을 바라시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이유는 우리의 마음을 움직여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하도록 하며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이다. 말씀은 우리를 교훈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우리를 설득하기 위해서 주어진다.

  우리는 창조 기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볼 수 있다. 창세기 1장에서는 자연환경 속에 있는 모든 것은 하나님에 의해 생겨났다는 것을 우리에게 확신시키는 것이다. 또한 당시의 형세에 대한 묘사로서 하나님의 사역에 대한 상세한 분석이 드러나게 된다. 한 단계 더 나아가서 하나님은 자신이 만든 남자와 여자에게 말씀하신다. 여기에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직접 말씀하시는 모습이 나온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과 인간의 교제는 시작된다. 

 하나님의 말씀이 정말로 세상의 사건들을 결정한다는 사실은 하나님이 예레미야를 선지자로 부르실 때 그에게 가르쳐 주신 첫 번째 교훈이었다. 하나님은 그에게 “보라 내가 오늘날 너를 열방 만국 위에 세우고 너로 뽑으며 파괴하며 파멸하며 넘어뜨리며 건설하며 심게 하였느니라”(렘 1:10)고 말씀하신다. 또한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해서도 똑같은 진리를 선포하신다. “비와 눈이 하늘에서 내려서는 다시 그리고 가지 않고 토지를 적시어서 싹이 나게 하며 열매가 맺게 하여... 과 같이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헛되이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뜻을 이루며”(사 55:10-11) 성경 전체는 하나님의 말씀이 모든 인간사에서 하나님의 뜻을 실행하는 수단이라는 주장을 편다. 하나님의 말씀하시는 것은 그대로 된다. 세상을 다스리고 우리의 운명을 정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참된 그리스도인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인정하고 그 아래 사는 사람들이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성경을 통해서 직접적으로 그들에게 주어졌고 그들 주위에 있는 것들을 창조하고 통제하고 정돈하기 위해 주어졌다는 것을 안다. 

 

 12) 하나님의 사랑

  사도 요한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일 4:8, 16)이라고 말씀한다.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것은 지상의 낙원을 얻은 것과 같다. 하나님의 사랑은 영적으로 건강하지 못하거나 기형적인 사람들만이 알지 못하는 것으로 얘기하며 바울이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롬 5:5)라고 말함으로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지식으로 의미한다. 

  하나님의 사랑은 개개 죄인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선하 심의 발휘로서 스스로를 그들의 복지와 동일시 하사 그들의 구세주가 되도록 자신의 아들을 보내시고 이제 그들이 언약 관계 속에서 하나님을 알고 즐기도록 하는 것이다. 

 

 13) 하나님의 은혜

  은혜란 하나님이 사람을 향해서 사랑으로 역사하시는 인격적인 활동이라고 학자들은 말한다. 우리는 은혜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기도하며 받기를 원하지만 우리의 삶 속에서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하나님의 은혜는 죄인들의 행위와는 반대로 그들의 죄과를 무시하고 그들에게 값없이 보이시는 사랑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선하심으로 보이는 것이다. 은혜와 구원은 원인과 결과로써 한데 결합되어 있다.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엡 2:5,8)

 신약은 하나님의 은혜를 세 가지 특정한 맥락에서 설명한다. (1) 죄 사함의 근원으로서의 은혜이다. 복음은 죄의 용서와 그에 따르는 우리 인격의 용납 곧 칭의를 중심으로 하고 있다. 칭의는 믿음에 의한 것이다. 그것은 사람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결정적으로 신뢰하는 순간에 일어난다. (2) 구원 계획의 동기로서의 은혜이다. 죄 사함은 복음의 핵심이다. 하지만 그것이 은혜의 교리 전체는 아니다. (3) 송도의 견인을 보장해주는 것으로서의 은혜이다. 구원 계획이 틀림없이 완성되는 것이라면 그리스도인의 미래는 보장된 것이다.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으며”(벧전 1:5)의 말씀을 통해 믿음은 은혜의 시작이 되며 은혜가 나의 믿음을 지켜줄 것이다. 

  사랑은 그 보답으로 사랑을 불러일으키고 사랑이 일단 불러일으켜지면 기쁨을 주기를 원하신다. 참으로 은혜를 받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감사에 넘쳐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대로 행하며 날마다 찬양하게 될 것이다. 

 

14) 심판자 하나님

  성경은 하나님이 심판자로 활동하신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심판자라는 말은 하나님에게 적용되는 것으로 성경 역사의 곳곳에 진술되어 있다.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에서 쫓아내고 심판하는 것, 금송아지 숭배로 인해 레위인을 심판하는 것, 나답과 아비후를 심판하는 것 등 하나님은 신구약에 관계없이 전반적으로 심판의 하나님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은 구약에서 신약으로 넘어가면서 심판이라는 주제가 더욱더 강조된다. 특히 세상의 구세주이신 신약의 예수님도 세상의 심판자이셨다.

  심판자 하나님의 특징은 네 가지의 개념이 포함되어 있다. (1) 심판자 하나님은 권위를 가진 분이다. 하나님은 세상의 심판자이시다. 하나님은 율법을 만드시고 우리가 그 율법을 지키느냐 지키지 않느냐에 따라 우리에게 보상을 해주실 권리를 갖고 계신다. (2) 심판자 하나님은 선하고 의로운 것과 일치하는 분이시다. 성경은 하나님이 의를 사랑하고 불의를 미워하신다는 것과 선하고 의로운 것에 전적으로 일치하는 재판관의 이상이 하나님 안에서 완전히 성취되었다는 것을 매우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3) 심판자 하나님은 진실을 분별하는 지혜를 지닌 분이다. 성경에서 심판하시는 하나님은 마음을 감찰하시는 분이자 사실을 발견하시는 분인 하나님의 전지 하심과 지혜를 강조한다. (4) 심판자 하나님은 판결을 시행할 수 있는 권세를 가진 분이다. 하나님은 법을 만들고 판결을 내리실 뿐만 아니라 처벌도 하신다. 모든 사법적 기능이 하나님 안에서 연합되어 있다. 

  최후의 심판은 우리의 행위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을 살펴보았을 것이다. 즉 우리의 행동 우리 삶의 여정 전체에 따라 되는 것이다. 또한 최후의 심판은 우리의 지식에 따라 이루어질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은밀한 것을 아신다. 심판 날에 우리의 과거 삶 전체가 말하자면 예수님 앞에서 상연되어 조사받을 것이다. 신약 성경은 심판 날에 너의 현재의 구세주를 부르라고 답한다. 심판자이신 예수님은 율법이시다. 하지만 구세주이신 예수님은 복음이시다. 

 

15) 하나님의 진노

 (1) 하나님의 진노의 의미

  로마서에서 나타나는 진노는 죄를 벌하는 하나님의 단호한 행동을 나타낸다. 그것은 죄인들에 대한 삼위 여호와의 사랑이 그런 것만큼이나 그분의 인격적 정서적 태도의 표현이다. 하나님의 진노는 죄에 대한 반응으로서 하나님의 정의의 표현이다.

 (2) 하나님의 진노의 계시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롬 1:18) 이것은 지속적인 드러남과 전 우주적임을 의미한다. 이러한 나타남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그것은 각 사람의 양심에 직접 각인된다. 또한 하나님의 분노의 활발한 표시들이 인류가 처한 상황에서 나타난다. 

 (3) 하나님의 진노로부터의 해방

  우리는 모두 ‘죄 아래’ 있고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온 세상이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다. 그렇다면 다가오는 진노에서 건져질 어떤 방법이 있는 것일까?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롬 5:9)에서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고 말씀하고 있다. 그것은 죄를 속하고 죄책을 소멸시킴으로써 진노를 막는 희생 제물인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복음의 핵심이다. 

  과거에 하나님의 진노라는 주제가 공론에 빠져 악의 있게 다루어졌음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알려고 한다면 하나님의 진노에 관한 진리를 깨닫고 우리가 진노로부터의 구원이라는 복음, 십자가의 대속적 업적, 하나님의 구속적 사랑의 놀라움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16) 인자와 엄위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를 보라”(롬 11:22)라고 말씀하고 있다. 즉 로마의 그리스도들이 하나님의 인자만을 강조해서도 안 되고 하나님의 엄위만을 강조해서도 안된다는 것이다. 둘 다 은혜의 섭리 안에서 나란히 나타나야 한다. 하나님이 참으로 알려지려면 두 속성이 함께 인정되어야 한다. 

  인자함이란 하나님에게서도 찬탄할 만하고 매력적이며 칭찬할 만한 어떤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도덕적 완전함 안에서 특별히 인자가 가리키는 한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관대함이라는 특성이다. 관대함이란 어떤 보상을 바라지 않고 그리고 받는 사람들이 그에 합당한 길에 구애받지 않고 일관되게 그것을 초월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주는 성향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엄위는 하나님이 자신의 인자하심을 일축해 버린 자들에게서 그 인자를 단호하게 거두시는 것을 나타낸다. 바울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나타내는 모든 표현의 배후에는 그 인자하심이 멸시를 당했을 때는 엄위하신 심판이 있으리라는 위협이 있음을 말하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우리에게서 돌아설 때 모든 책임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엄위를 성급하게 나타내지 않으신다. “더디 노하시며”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인내와 관용을 중시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세 가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1) 하나님의 인자에 감사하라는 것이다. 우리가 받은 복을 기억하면서 이 모든 것에 대해 감사해야 한다. 성경은 우리 죄인들이 하나님과 화목하도록 아기 위해 고난당하시고 죽으신 구세주를 보여준다. (2) 하나님의 인내에 감사하라는 것이다. (3) 하나님의 징계에 감사하라는 것이다. 

 

 17) 질투하시는 하나님

 (1) 하나님의 질투에 대한 성경의 진술들은 하나님을 우리 인간의 삶에서 이끌어 낸 언어로 묘사한 것이다. 하나님은 인격적인 존재시며 우리 역시 물리적 창조계의 어떤 것과도 다른 인격적 존재이다. 하나님의 진노는 사법적인 행동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의로움이다. (2) 인간에게는 두 종류의 질투가 있으며 그중 하나만이 악덕이다. 사악한 질투가 있다. 그것은 우리의 타락한 성품을 성장시키는 요인으로 교만에서 북돋아지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종류의 질투도 있다. 그것은 사랑의 관계를 보호하려는 혹은 깨어졌을 때 복수하려는 열심인 것이다. 이러한 종류의 질투는 긍정적인 미덕이다. 

 하나님의 질투는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열심을 가질 것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대한 하나님의 관심은 지대하다. 따라서 하나님의 대한 우리의 관심 역시 지대해야 한다. 그러한 헌신을 나타내는 성경의 용어는 열심히 때로는 하나님의 질투라고 불리는 것이다. 

 하나님의 질투는 하나님께 대한 열심히 없는 교회들을 위협한다. 우리는 교회를 사랑한다. 그 교회들은 신성한 교제를 나누고 있다. 하지만 주 예수님은 자기만족에 빠져 있는 라오디게아 교회에 메시지를 보내셨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덥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덥든지 하기를 원하노라”라고 말씀하셨다. 진노 속에서 자비를 기억하시는 하나님의 자비에 의해 우리가 회개할 열심을 발견해야 한다. 

 

18) 복음의 핵심

  성경은 우리를 이방 종교의 세계로부터 완전히 분리시킨다. 성경은 이방 종교를 진리를 왜곡시키는 것으로 정죄한다. 화목과 거리가 먼 것처럼 느낄 수 있지만 화목의 개념(제물을 드림으로써 하나님의 진노를 피한다)은 성경 전체 속에 흐르고 있다. (1) 화목은 하나님의 사역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직접 나서서 자신의 진노를 화목시키신다. (2) 화목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의해 이루어진다. (3) 화목은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 보인다. 복음은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 인간과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인간이 되셨으며 우리를 영원한 심판으로부터 구원하려고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고 공표한다. 성경은 구원을 위한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대해 기본적으로 화목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것은 죄를 제거하고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교제를 회복시키는 것과 관계가 있다. 

  예수님은 행동의 사람이었다. 메시아적 역할을 수행하는 신적 위격임을 알고 계셨다. 예수님의 메시아적 사명의 핵심은 죽임을 당하시는 것이었다. 죽음을 가장 두려운 체험으로 여기셨다. 예수님의 삶의 추진력은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8)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값없이 주신 것(엡 2:1-5)이고 영원한 것(엡 1:4)이며 무조건적인 것이고 주권적인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의 의미는 하늘의 상속자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즉 인격, 직무, 업적)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고후 4:6)을 찬양하는 것이다. 복음의 핵심인 구속의 사랑과 화목의 자비라는 기쁜 소식을 끝없이 찬양하는 것이다.

 

19) 하나님의 아들들

  그리스도인이란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있는 사람이다. 여기서는 모든 사람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죄인임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죄를 지신 분과 주님으로 믿는 사람들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 됨은 중생함으로써 우리의 것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은혜의 선물이다. 요한복음에는 주님에게 하나님이 아버지 되신다는 것을 네 가지로 의미하고 있다. 권위를 의미한다. 애정을 의미한다. 교제를 의미한다. 영광을 의미한다. 

 양자 됨이라 함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보는 가족의 개념이며 지속되는 복이다. 그리스도인의 삶 전체가 양자 됨에 비추어 이해되어야 한다. 예수님은 언제나 자신의 제자들을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들로 생각하셨다. 또한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양자로서 아들 되었다는 것을 아는 지식이 우리의 삶 역시 주관해야 한다고 주장하신다. 

  산상수훈에서 양자 됨은 믿음의 삶 즉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할 때 하나님이 우리의 물질적 필요를 채워 주실 것을 믿는 삶의 기초로 나타난다. 양자 됨이라 함은 헬라어로 ‘아들로 임명한다’는 의미로 사용된다. 우리의 양자 됨은 하나님의 사랑의 위대함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우리의 양자 됨은 그리스도인의 소망의 영광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양자 됨의 교리는 우리가 약속받은 유업의 핵심이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누는 것이다. 또한 엄청나게 많은 구속받은 자들이 하늘나라에서 아버지 하나님과 형 예수님과 얼굴을 맞대고 만나 교제하는 가족 모임을 갖게 되리라는 것을 말해준다. 양자 됨은 우리에게 성령님의 사역을 이해하는 열쇠를 제공한다. 여기서 중요한 진리는 성령님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양자의 영’으로 주어지며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모든 사역에서 그분이 양자의 영으로 활동하신다는 것이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이며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며 하늘나라가 우리의 집임을 기억해야 한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 그리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비결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겸손하게 하시며 우리를 훈육하시며 우리를 참된 자녀로 만드신다. 

 

20) 우리의 인도자 하나님 

  우리는 예수님을 통하여 인도를 볼 수 있다. 하나님의 인도를 따르는 것이 환난을 가져온다는 진리에 대한 최종적인 예이다. 인간적인 계산으로는 아무리 보아도 십자가는 낭비이나 하나님의 진술에 의해서만 그 의미와 성취의 비밀을 알 수 있다. 우리를 어두움에서 빛으로 이끄시려고 나온 하나님의 인도는 또한 우리를 빛에서 어두움으로 이끌고 갈 것이다. 그것은 십자가의 길의 일부인 것이다.

  우리 하나님은 회복시키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실수와 어리석은 행동을 우리를 위한 그분의 계획 가운데 녹아들게 하시며 그것으로부터 선을 가져오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비로운 주권에서 나오는 경이의 일부이다. 인도는 은혜의 언약 하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모든 복의 행위와 마찬가지로 주권적 행위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안전은 이미 해결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보호자 되시는 하나님’께 기대는 기쁨을 희미하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 

 

21) 이 내적 시련들

 신약에서 은혜란 사랑과는 정반대 되는 것을 받아 마땅한 사람들을 위해 하나님이 행동으로 베푸는 사랑을 의미한다. 즉 구원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이며 이것의 역사는 하나님이 시작하신 “너희 속의 착한 일”(빌 1:6)로부터 시작된다. 은혜의 목적은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를 회복시키는 것이고 그 이후로 그분과 교제하면서 살도록 하기 위함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꼭 붙잡는 법을 확실히 배우도록 은혜 안에서 이러한 목적을 수행하신다.  하나님은 이러한 목적을 위해서 죄와 실수를 사용하신다. 하나님은 우리의 심각한 어리석음에서도 선을 이끌어 낼 수 있다. 하나님은 실수를 통해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알도록 그리고 하나님께 매달리도록 가르쳤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회복시키시는 은혜가 우리에게 항상 있음을 기억하며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한다.

 

22) 하나님의 충족성

  진정한 그리스도인에게 공통되는 두 요소가 있는데 전면적인 의에 대한 헌신, 전면적인 압력들에 노출된다는 것이다. 바울은 독자들을 이런 사람으로 묘사한다. 그리고 너희가 복음을 통해 하나님에 대해 아는 것을 생각해 보고 그것을 적용해 보라고 말한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오?” 이 개념은 어떠한 반대도 최종적으로 우리를 꺾을 수 없다는 것이다. 바울은 주권적인 보호자이신 하나님의 충족성과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적 헌신의 단호함을 제시한다. 여기서 “우리를 위하시면”이라는 단어는 언약에 대한 헌신의 표명이다.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오?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오?” 이것은 어떤 죄목도 결코 우리의 상속권을 박탈할 수 없다는 것이다. 바울은 주권적 옹호자이신 하나님의 충족성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 하시는 판결의 단호함을 지적하고 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오?” 이 개념은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단절되는 일은 우리에게 결코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바울은 우리의 주권적인 파수꾼으로 제시함으로 그리고 우리의 운명을 정하심에서 신적 사랑의 확고함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삶의 우선순위를 바로 잡을 수 있고 또 바로잡아야만 하는 시점에 이르렀다. “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 하실 때에 내 마음이 주께 말하되 여호와여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 하였나이다”(시 27:8)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하나님을 찾아야 한다. 

 

 

 제임스 패커는 하나님을 알아야 할 이유와 방법, 하나님에 대한 연구가 왜 중요한지,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지 말하고 무엇보다 아는 것의 주권은 하나님께 있음을 말한다. 책을 몇 챕터 읽을 즈음 내용이 방대하겠다고 느껴졌다. 그래서 읽으며 바로바로 적어 내려갔다. 내용 요약이라기보다 각 챕터의 여러 문장 중 일부만 추려 계속해서 적어가는 정리를 하게 되었다. 분량은 방대해지고 정리가 되지 않았다. 주어진 분량을 맞추고자 문단을 삭제해가고 다시 읽어 내려가 보니 그제야 정리가 되고 마음이 참 아팠다. 나에게 있어서 하나님께서 선하다 하시는 것이 선한 것이 아니라, 내 경험과 지식이 판단의 기준이 되어 선과 악을 끊임없이 심판해 왔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빌어 내 생각대로 되길 바랬다. 진로를 결정할 때도 인도하심이라 확신했지만 그 안에서 이것도 해야 하는 하나의 필요성도 첨가되어 있었다. 변치 않으시는 하나님의 위엄과 지혜, 그분의 사랑과 은혜, 심판과 진노, 엄위와 질투하심 등 하나님에 대해서 뚜렷한 책 내용은 절대 선이신 하나님 앞에 교만한 내 모습을 돌아보게 했다. 대학생 선교단체에서 수년을 보내며 하나님께서 보여주시지 않으면 하나님을 알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아는 것처럼 살아가는 가식의 면모를 얼마나 많은 제자들에게 보였는가. 참 부끄럽다. 제임스 패커는 철저히 회개해야 한다고 했다. 아는 것의 모든 주권은 하나님께 있다. 하나님께서 나를 먼저 아시기에.. 그래서 한편으로 이 부끄러움을 인정할 수 있게 되었음에 감사하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라는 이 책은 나에게 전 생애가 하나님을 알아가는 과정이라는 것과 진리의 말씀 속에서 하나님께서 선명하게 보여주시는 은혜를 누리는 것이 나의 삶이라는 것을 새기게 하였다. 이젠 부끄러움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선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하며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뜻 가운데에 감사와 찬양으로 풍성히 누리기를 소망해본다.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인도하셨는가. 나를 택하시고 예수님을 보내주셔서 나를 양자 삼으시고 어떻게 걸음걸음 인도하셨는가. 하나님의 성실하심을 이제는 깊이 신뢰하고 싶다. 끊임없이 나의 본성은 하나님을 아는 것처럼 교만하게 살아가려 하지만 내적인 이 모든 시련 속에서도 하나님은 나를 준비시키신다. 하나님을 알아가는 이 과정 전체가 하나님 한분이면 충분하다는 것을 가르쳐 줄 것이다. ‘여호와를 앙망합니다. 하나님을 더 깊이 알아감을 누리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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