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어거스틴의 고백록 _ 제 6권 정신적 방황의 계속_제 7권 플라톤주의의 영향(내용 요약/ 정리/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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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책

성 어거스틴의 고백록 _ 제 6권 정신적 방황의 계속_제 7권 플라톤주의의 영향(내용 요약/ 정리/ 생각)

by 뀨뀨스토리 2022. 5.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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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6권 정신적 방황의 계속

 마니교에서 나와 부모님의 당부로 보편교회의 학습교인의 지위를 유지하기로 작정하며 지내지만, 여전히 방황하는 상태를 유지하게 된다. 주를 찾아 헤매었다가 믿음을 잃고 진리를 찾을 수 없어 낙심하고 있을 때 아우구스티누스의 “믿음이 굳센 어머니”가 찾아오셨다. 바다의 풍랑을 만날 때 오히려 뱃사람들에게 안전하게 도착하리라고 약속하며 위로하시고, 늘 아우구스티누스를 위해 애곡하며 간절히 기도하며, 주께서 약속을 이루어 주실 것이라 확신하며 그리스도를 믿으니 이승의 삶이 끝나기 전에 올바른 그리스도이닝 되는 것을 볼 것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으시던 어머니.

 어느 날은 습관대로 죽과 빵과 포도주를 성인 기념관에 봉헌하려 했을 때 문지기의 저지를 받는다. 암브로시우스 감독이 금지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매우 경건하게 그에 순종하였다고 기록하며, 금지에 대한 불평보다는 오히려 주저 없이 자기 자신의 습관을 나무라는 모습을 보고 놀란다. 금지한 것에 대해 멈추는 것이 아니라 할 수 있는 방법 즉 순전한 마음, 기도하는 심정을 가지고 가는 법을 배웠고, “가난 이들을 돌보고 순교자들이 주님의 수난을 본받아 스스로 희생 제물이 됨으로써 [생명의] 면류관을 얻은 장소에서 주님의 성만찬에 참예하였다”라고 고백한다. 다른 사람이 아닌 존경하던 암브로시우스였기에 가능했던 것이라 말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어려움을 도와달라고 기도하지는 못하고 더욱 학문에만 몰두하고 논쟁에만 열을 올리고 있었고, 암브로시우스에게 마음속의 고민을 이야기하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암브로시우스가 늘 조용히 독서에 열중하는 모습을 보고 물어볼 수가 없었으며, 자신을 괴롭히던 여러 문제를 다 털어놓으려면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지만, 그럴만한 시간적 여유도 없었었다. 주일마다 암브로시우스의 설교말씀만 들을 수 있었는데 이 설교를 통하여 자신이 반대해 왔던 것이 보편교회의 전통신앙이 아니라 “육신적인 생각이 만들어 낸 허상인 것”을 깨닫고 부끄러움과 기쁨을 동시에 느끼게 된다.

 내가 실로 불손하고 불경견했던 것은, 탐구하며 학습해야 할 일에 대하여 오히려 비난의 말을 퍼부었다는 것이다. -p150

 확실치도 않을 것을 확실한 것처럼 지껄이고 다닌 일이 부끄러웠고 그럴수록 확실한 것을 붙잡아야겠다는 소원이 생겼다, 그리고 불확실한 것을 확실한 것이 확실해졌을 때 알게 된 것은 자신이 맹렬히 비난하던 것을 교회가 가르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또한 구약성경의 율법과 선지자들을 이전과는 다른 관점에서 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전에는 이것을 대할 때 허황된 것처럼 보았고, 성도를 비난했으니, 문자적으로 이해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문자는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라”는 말씀을 성경해석의 가장 중요한 기준인 것처럼 권면하는 소리를 즐거운 마음으로 듣곤 했다고 한다. 그때부터 보편교회의 가르침을 더욱 좋아하게 된 아우구스티누스는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일들을 보지 못했고, 자신이 현장에 없었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되었고, 사람들의 말을 믿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알 수 없다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성경을 믿는 자들이 잘못이 아니라,  믿지 않는 자들이 잘못이라는 사실을 확실히 믿게 하셨다고 고백한다. 

 또한 순수이성으로는 진리를 발견할 수 없는 까닭에, 성경의 권위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고, “성경에다 온 세상에서 그토록 엄청난 권위를 부여하신 것은 오직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을 믿고,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을 찾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라는 것을 조금씩 믿을 수 있었다고 한다. 

 내가 명예와 부와 결혼의 행복을 추구하고 있을 때 당신은 나를 비웃으셨나이다. 당신은 나로 하여금 당신 아닌 것에서 즐거움을 느끼는 것을 허락지 않으심으로써 내게 은혜를 더하셨나이다

거지를 보며 과연 누가 행복한 자인가를 생각하며, 자신이 헛되 영광을 찾고 있는 것에 대한 회의감을 느끼게 된다. 

 알뤼피우스와 네브리디우스는 가장 친밀하게 대화를 나누던 친구였다. 그중 알뤼피우스는 같은 도시 출신에, 수사학을 가르칠 때 자신에게 배웠던 학생이었다. 원형극장을 너무 좋아하여 걱정되어 충고를 하고 싶었으나 여건이 되지 않았고, 후에 어느 한 날 수업시간에 원형극장의 비유를 사용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원형극장을 광적으로 좋아하는 사람을 비웃으며 꼬집어 주었는데, 알뤼피우스는 그것을 자신에게 적용시키며 자기를 꾸짖고 아우구스티누스를 더욱 사랑하였다고 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것은 자신이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만이 아시는 질서로, 의로운 질서를 따라 모든 사람을 사용하신다”고 고백하게 된다. 또한 자신이 결단하여 검투 구경에 빠지지 않을 것이라고 고백한 알뤼피우스는 오히려 학우들을 불러 함께 가자고 할 만큼 탐닉하게 되었지만,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일로 하여금 알뤼피우스가 자신을 믿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을 믿도록 가르쳐 주셨다고 이야기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복된 삶을 원하면서도, 그곳에 가는 것을 두려워했다. 이미 습관화된 쾌락을 끊기 힘들어했고, 여자를 포옹 할 수 없다면 너무나 비참할 것이라 여기고 있었고, 성적쾌락에 밀착되어 있어서 독신생활은 결코 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을 듣고 알뤼피우스는 놀랐다. 

우리는 둘 다 집안을 다스리고 자녀를 기른다는 결혼한 사람들의 신성한 의무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었나이다. 도리어 나는 채워지지 않는 정욕을 채우려는 습관에 사로잡혀, 엄청난 고통을 당하는 것이 보통이었고, 그는 호기심으로 인하여 종살이로 끌려가고 있었나이다.

 어머니의 결혼 재촉이 끊임 없이 오자, 아우구스티누스는 구혼을 하게 되고, 결혼에 지장이 된다는 이유로 동거녀와 헤어지게 된다. 그리고 구혼한 여자를 맞이하게 될 그 2년이 견딜 수 없이 지루하여 다른 동거녀를 얻었다고, 동거가 좋아서 그런 것이 아닌 정욕의 노예가 된 탓으로 더 심해져 간다. 

만약 우리가 영원히 죽지 않고 육체의 쾌락을 잃어버릴 염려가 전혀 없이 항상 누릴 수만 있다면, 행복하지 않을 이유가 어디 있겠으며, 더 바랄 것이 또 어디 있겠는가?

이런 생각이 불행의 원인인 줄도 모르고 덕과 아름다움이라는 빛을 보지 못하였다고 고백한다.

 

 제 7권 플라톤주의의 영향

 나이가 들어갈수록 헛된 생각으로 더 사악해지고,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있는 것 외에는 생각지 못했다. 자신이 어떠한 존재인지도 잘 알지 못하는 심령이 우둔했던 나라고 고백했던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의 본성에 대해 묵상을 생각하게 되고. 하나님을 어떻게 생각해야 옳은지 아직 알지 못했지만,

나는 인간, 곧 하찮은 인간에 지나지 않았으나, 당신을 지극히 높으시고 유일하시고 참되신 하나님으로 생각하고자 노력하였으며, 당신은 썩지 않으시고 손상 받지 않으시며 변함이 없으신 분이라는 사실을 마음속에 깊이에서부터 믿었나이다

라고 말하고 있다. 

 또한 마니교들은 스스로 속으면서 남을 속이는 자들로 말은 많이 하면서 벙어리 된 들이고, 이들의 입에서는 당신의 말씀이 나오지 않는다고 비판하였다.

하나님의 본성을 생각하며 그 본성을 믿었지만, 악의 근원에 대하여서는 명확한 해답을 얻지 못해 탐구하게 되었고, 우리가 악을 행하는 것은 자유의지 때문이고, 우리가 고난 받는 것은 당신의 의로운 심판 때문이라는 말을 듣고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했었으나, 무엇을 하든지 원하지 않든지 그 의지의 주체는 나 자신이라는 사실이 명확해 지면서, 죄악의 원인이 자신임을 깨닫게 된다. 또한 악은 어디서 오는 지 근원을 찾고 있을 때 그것을 찾는 방법이 악하였다며, “내가 나의 탐구 그 자체에 악을 보지 못하였”음을 생각한다.

 계속되는 “악은 어디서 오는가?”에 대한 고민을 할 때, 해답을 얻지 못함에 대해 “해산의 고통”을 느꼈다. 생각을 하려고 할 때면 육신적 영상들이 주님께로 나아가는 길을 가로막으며, “더러운 녀석아, 어림도 없이 어디로 가는 것이냐?”고 말하는 것 같았고 이것은 상처에서 자랐고,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억누르시고 겸손케 하시는 까닭이리라 하며 “나는 교만으로 인해 단신과 분리되었으며, 얼굴이 너무 많이 부어올라 눈을 가릴 지경이었나이다” 고백한다.

 하나님이 자신에게 먼저 보여주시기 원했던 것은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는 사실과 사람들에게 겸손의 길을 보여주시기 원하며, 로고스로 하여금 “육신이 되어” 사람들 가운데 거하셨다는 사실이었다. 하나님이 라틴어로 번역된 플라톤 주의자들의 몇 가지 책들을 지극히 엄청난 교만으로 부풀어 오른 어떤 사람을 통하여 마련해 주었고, 하나님은 자신을 그 책들을 통해 자신으로 돌아가라는 권면을 받았는데,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나는 나의 내면 가장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으며,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나의 돕는 자가” 되셨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의 본성과 하나님을 어떻게 생각해야 옳은가에 대해 고민하하면서 하나님께서 돕는 자가 되셔서 하나님 외에도 피조물의 본성, 창조하신 만물에 대해 깊은 깨달음을 얻게 된다.  그 깨달음의 고백은 “나는 더 이상 더 좋은 세계를 바라지 않았나이다” 이다. 그러면서도 내 영혼이 싫어하는 것들을 하나님의 창조물이라 인정하고 싶지 않아했다. 이원론을 버리게 되며 돌이켜 보니,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붙들고 계심을 깨달게 되고 지나간 모든 시간이나 앞으로 올 모든 시간은 항상 일하시며 항상 존재하시는 하나님 없이는 가지도 오지도 못함 깨닫게 된다.

 죄가 무엇인지를 궁구해 본 결과, 그것은 실체가 아니라 의지의 왜곡임을 깨달고. 하늘이나 땅에 있는 여러 물체들의 아름다움을 평가하는 근거는 무엇이며, “이것은 이래야 하고, 저것은 저래야 한다”고 생각하고 말할 때의 정확한 판단 기준은 무엇인지를 알고 싶어 했다. 알보는 중에 변전하는 정신보다 훨씬 위에 있는 진리의 영원함을 발견하였다, “그 영원함은 불변적이고 진실된 것”이었다.

 하나님을 향유하는 데 필요한 힘을 얻고 길을 찾아보았고,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 되신 분, 그리스도 예수를 영접할 때까지는 찾지 못하였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이 겸손하지 못하여 겸손하신 하나님 예수를 붙들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의 연약함이 무엇을 가르쳐 주는지 깨닫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고 한다. 단순히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탁원한 지혜를 소유한 인간으로만 생각했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예수그리스도를 다름 모든 사람보다 월등히 뛰어나다고 생각한 것은 그가 아주 탁원한 인간성과 보다 완전한 지혜를 지녔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플라톤 학파의 책들을 읽고 무형의 진리를 탐구하라는 권면을 받았다. 하나님의 길을 “우리 구주”이신 그리스도에서 찾지 않는 유식한가가 되기는커녕 멸망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 책들을 먼저 접하게 된 것은, 당신의 뜻이었으니, 그 책들에서 받은 인상이 나의 기억 속에 각인되어 내가 당신의 책을 통해 길들여지고, 당신의 치료하시는 손길로 나의 상처가 어루만짐을 받은 후에, 교만한 자기만족과 겸손한 신앙고백의 차이, 가야 할 목적지는 알면서도 그리로 가는 길은 모르는 잘들과, 복된 나라로 인도하는 길을 보여 줄 뿐 아니라 거기에 가서 살 수 있도록 길이 되어 주시는 분과의 차이가 무엇인지 나로 하여금 알아차리라고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나이다 p202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의 영으로 감도함을 받은 고귀한 책, 바울 서신을 열심히 탐독했고, 이전에 바울에 대해 가지고 있던 의문들이 사라지고, 그 말씀의 순견한 모습이 드러나기 시작되었다. 그러나 플라톤 학파의 책들에는 이런 내용이 없다고 말한다. “상한 심령”,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 당신의 신부인 도성, 성령의 보증, 구속,의 잔에 관한 기록도 찾아볼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부르는 음성도 들리지 않았고, 나는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게 배우라고 말씀하시는 분에게 배우기 싫어하였다고 말하며, 바울서신을 읽을 때마다 마음속에 파고 들어와서, 하나님의 역사를 생각할 때마다 두려워 떨었다고 고백한다.

 

 나는 하나님에 대해 얼마만큼 씨름을 하고 있는가? 하나님을 너무 쉽게 믿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시험을 위해 하나님에 대해 듣고 외우고 만다. 내가 지금까지 믿어왔던 하나님은 어떤 분이셨을까? 조금 느낀 것을 가지고 그것이 다인 것처럼 지혜로운 척 하나님을 아는 척 하나님을 다 아는 것처럼 아이들에게 설교하지는 않았는지 보게 뒤돌아보게 만든다. 끊임없이 진리를 추구하고 끊임없이 사색하고, 알아가는 모습은 시간만 되면 티비를 켜고, 시간만 있으면 영화, 쇼핑, 취미생활을 하는 내 모습과는 대조적이다. 정욕의 쾌락에서 싸우고 갈등하는 부분에서는 결국 나와 같은 사람이구나를 생각하면서도 전체적으로 추구하는 방향자체가 다르다. 믿음으로 신학하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간절히.. 간절히 사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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