톰 라이트 칭의론 다시 읽기 (박영돈, IVP)
라이트는 전통적 바울 해석과 칭의론에 반기를 든 이유를 ‘모든 전통은 성경의 빛 가운데 새롭게 조명되어야 한다’는 종교개혁의 근본정신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라고 밝힌다. 바울에 대한 전통적 해석은 16세기의 시각으로 이해하여 심각하게 왜곡되어서 라이트는 새로운 해석을 시도했다. 1세기의 시각으로 읽어야 하며, 성경 고유의 문맥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이처럼 라이트는 모든 전통과 해석이 성경에 비추어 재조명되어야 한다는 종교개혁의 원리를 철저하게 따른다. 그렇다면 라이트의 주장을 주관하는 틀은 성경적 범주인가 확인해보자. 그는 샌더스에게서 전수받은 언약적 율법주의라는 사상, 제임스 던이 발전시킨 율법의 행위에 대한 견해, 하나님의 의에 대한 자신의 새로운 개념으로 새 관점의 기본 입장을 드러낸다. 저자는 성경을 부분적으로 보며 교리에 성경을 맞추는 것이 아닌 신구약 성경 전체의 흐름 속에서 칭의는 언약과 하나님 나라를 포괄하는 관점으로 바라봐야 한다고 정리한다. 칭의는 단순한 개인 구원 문제가 아니라는 라이트의 주장처럼 칭의는 새로운 이스라엘, 즉 교회를 통해 이 땅을 새롭게 함으로 만물 안에 하나님의 통치가 실제가 되는 하나님의 나라를 포괄한다.
라이트는 자신이 샌더스와 제임스 던을 따르는 새 관점 학파로 규정되기를 원하지는 않는다. 그는 옛 관점, 새 관점을 넘어 바울을 역사적, 주해적, 신학적, 목회적으로 좀 더 정당하게 다룰 수 있는 다른 관점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라이트는 샌더스의 주장에 모두 동의하지는 않고 샌더스의 기본 입장만큼은 바울과 유대교에 대한 전통적 이해에 대해 혁신적인 견해라며 호응한다.
샌더스는 그의 책 [바울과 팔레스타인 유대교]에서 제2 성전 시대의 초기 랍비 문헌, 사해 사본, 지혜 문서, 가경들에 대한 폭넓은 연구를 통해 유대교에 대한 아주 색다른 이해를 제시했다. 예수님과 바울 시대 1세기 팔레스타인 유대교에는 율법주의가 존재하지 않았고 하나님의 선택과 언약에 근거한 은혜의 종교였다고 주장한다. 율법을 지킨 것은 은혜에 대한 감사 반응이고 언약 관계 속으로 들어가기 위한 것이 아닌 언약 안에 머물기 위한 수단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당시 유대교는 율법주의가 아닌 언약적 율법주의, 언약적 신율 주의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 샌더스의 주장이다.
바울은 그렇다면 왜 유대교를 비판했는가. 바울이 율법의 행위를 반대한 이유는 율법이 구원의 수단으로 제시되기 때문이었다. 샌더스는 “오직 그리스도 안의 하나님의 행위만이 구원을 제공하며, 그렇기에 다른 모든 것을 실제로 무익한 것처럼 만들어 버린다는 논리가 율법에 대한 바울의 견해를 지배하고 있는 것 같다.”라고 한다. 또한 율법의 행위를 구원의 방편으로 제시하면 이방인을 제외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에 바울이 반대한 것은 유대교의 율법주의가 아닌 배타주의였다고 본다. 결국 샌더스는 유대교의 문제는 “기독교가 아니라는 검”으로 결론짓는다.
샌더스는 칭의는 바울 복음의 핵심이 아닌 부수적 가르침이라고 한다. 칭의는 언약 백성의 신분에 관한 것인데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획득하기에 신분 얻는 조건이 율법의 행위일 수 없다. 칭의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받아들이는 언약을 하나님이 신실하게 성취하시는 일에 근거한다. 그의 견해는 전통적 칭의론과 상당히 유사해 보이지만 그는 죄의 지배에서 그리스도의 지배로 전환하는 개념으로 칭의를 이해한다. 라이트는 샌더스의 연구에 그 해석 틀이 실제 바울서신에 어떻게 작용하는지에 대한 연구가 결여됨을 지적한다. 라이트는 샌더스의 주장에 지적하는 부분이 많지만 유대교와 바울에 대한 그의 획기적인 이해는 적극 수용하여 바울 해석의 근간으로 삼고 바울서신의 광범위한 주해를 통해 증명하려고 했다.
라이트는 개신교의 전통적 입장이 바울이 율법주의를 비판하는 맥락으로 칭의론을 전파했다고 잘못 이해함으로써, 바울이 진정으로 말하는 바를 완전히 곡해했다고 한다. 샌더스의 책이 나온 후 제2 성전 시대 유대교가 언약적 율법주의라는 주장에 대한 많은 반론이 제기되었고 라이트도 1세기 유대교에 대한 정확한 그림을 파악할 확실한 보장은 없다는 점을 수긍한다. 그럼에도 라이트는 학자들의 반론이 샌더스의 입장을 근본적으로 흔들 정도로 설득력이 있다고 보지는 않는다. 라이트는 많은 1세기 유대인들이 언약의 성취가 당대에 일어나기를 기대했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그 구원이 언제 임할지 다니엘 9장에 근거하여 추정하고 거기에 언급된 70년 유배 기간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보면서 그들이 대망하던 구원과 해방의 날이 그 시대에 임박했다고 믿는다. 라이트가 볼 때 이것이 바울 사상적, 역사적 배경이었다고 단언한다. 바울의 복음을 총괄적으로 주관하는 핵심 주제는 아브라함과 그 후손과 맺으신 언약을 끝내 성취하고야 마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남으로써 이스라엘의 오랜 숙원인 유배 상태에서의 획기적 해방이 임했다는 것이 라이트의 주장이다. 개종하기 전의 바울도 여느 1세기 유대인들과 똑같이 언약을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극적으로 나타나 이스라엘이 유배 상태에서 귀환하기를 학수고대했다는 것이다. 라이트의 주장에 따르면 바울은 회심한 후에도 자신과 동일한 소망과 기대를 가지고 있던 동료 유대인들에게 이스라엘의 언약과 소망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고 전했다. 그것이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의 핵심 주제와 맥락을 형성한다. 라이트는 ‘유배로부터의 귀환’이라는 사상이 이를 미처 생각하지 못한 샌더스나 제임스 던과 자신을 차별화하는 독창적인 아이디어이며 새 관점의 미비한 면을 보완하여 발전시킨 점이라고 자부한다.
제임스 던은 제2 성전 시대 유대교에 대한 샌더스의 입장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언약적 율법주의라면 왜 바울은 그의 서신에서 율법의 행위를 비판했는가에 대해 새로운 답변을 제시한다. 그러나 바울이 율법을 믿음에 적대적인 것으로 보고 거부하였다는 샌더스의 제안은 받아들이기 힘들다고 비판한다. 유대교가 언약에 기초한 은혜의 종교라면 바울이 율법의 행위를 배격한 이유는 무엇일까? 만약 율법주의가 아니라면 어떤 오류에 대응해서 바울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칭의론을 전했다는 말인가? 던은 바울이 유대교와 근본적으로 연속선상에 서 있다고 이해한다. 바울의 구원 관도 당시 유대교가 따르던 언약적 율법주의와 그 맥을 같이한다고 본다. 던은 바울의 칭의론은 잘못된 유대교 구원론에 대한 공격이 아닌 민족적 우월의식과 배타주의를 겨냥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칭의론은 원래 바울에게 계시로 주어진 복음이 아닌 이방 선교 상황에서 야기된 민족 갈등과 교회 분열을 해결하기 위해 등장한 교리다. 바울이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없다고 한 것은 율법의 행위가 원칙적으로는 모든 율법의 요구를 포함한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바울이 처한 상황에서 율법의 행위는 유대인과 이방인을 갈라놓는 장벽 역할을 하는 특별한 부류의 율법을 뜻한다게 던의 주장이다. 이는 유대인이 구별된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라는 분명한 표징 역할을 하는 율법(할례, 안식일, 음식법)을 가리킨다. 이런 관점에서 던은 바울이 이방인도 유대인과 똑같이 이런 율법 의식을 지켜야만 언약 백성의 일원이 될 수 있다는 유대인들의 민족적 우월주의와 배타주의를 비판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결국 유대인과 이방인을 분리시키는 이 사회적, 문화적 장벽을 허물기 위해 바울의 칭의론이 등장했다고 던은 역설한다. 던은 바울의 칭의론은 개인 구원이 아닌 민족적, 교회적 갈등의 해결책을 제시했다고 보는 것이다. 던은 이런 관점에서 율법의 행위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말씀이 기록된 갈라디아서와 로마서의 본문을 재해석한다. 던은 의로움과 칭의에 대한 바울의 개념은 철저히 유대적이라고 본다. 하나님의 의는 이스라엘의 언약에 충실한 결과로 그들을 위해 옳다는 판결을 내리시는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성이라는 것이다.
던은 바울이 선언한 ‘율법의 행위에 속한 자는 저주 아래 있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으셨다’는 것에 대해 율법의 행위는 율법의 모든 요구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유대인이 이방인과 구별된 언약 백성이라는 표징인 할례와 음식법 등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또한 그리스도가 자신을 이방인 위치에 두셔서 율법의 저주 아래 있는 유대인과 이방인에게 동일하게 구원이 임하게 하셨다고 해석하는데 이런 던의 해석은 라이트도 지적했듯이 매우 억지스럽고 신빙성이 결여되어 있었다. 던은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제거한 저주는 율법을 오해한 저주라고 본다. 곧 유대인의 민족주의적 오만에 대한 율법의 저주를 대신 지신 것이다. 물론 던은 아브라함의 언약이 이방인에게 미치는 것을 막는 ‘율법의 잘못된 이해’의 저주가 제거됨으로써 이방인들이 이제 아브라함 언약 축복의 수혜자가 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죽음을 대리적 속죄로 이해하지 않는다. 따라서 던의 해석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유대인과 아무 관계가 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라이트는 던이 율법의 행위를 새롭게 해석함으로써 샌더스가 닦아 놓은 언약적 율법주의의 터 위에 바울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더욱 공고히 다질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고 본다. 그러나 ‘율법의 행위에 속한 이는 율법의 저주 아래 있다’는 바울의 언급에 대한 던의 해석은 설득력이 없다고 본다. 라이트에 따르면 그 저주는 개인적이라기보다는 국가적, 즉 이스라엘 전체가 유배된 것이다. 라이트는 이런 유배 상태가 1세기에도 계속되었다고 보는 것이 당시 유대인의 보편적 인식이며 믿음이었다고 주장한다. 무엇보다 구약 선지서가 이스라엘의 유배 상태가 온전히 회복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시사해준다. 라이트는 율법의 행위에 대한 새로운 해석으로 ‘율법의 저주’에 대한 바울의 언급을 계속되는 유배의 관점에서 극복하려고 한다.
라이트가 볼 때, 예수 그리스도의 대표적인 죽음과 부활을 통해 유배 기간이 막을 내리고 저주가 걷힌 것이다. 동시에 하나님의 언약적 축복이 이제는 이방인에게까지 미치게 되었다. 새 언약의 영인 성령의 선물이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이방인에게도 주어진다는 사실이 그 확증이다.
라이트는 샌더스와 던의 새 관점을 잘 다듬어 칭의론에 대한 해석의 틀을 세우는 기초로 삼는다. 그들의 기본 입장을 따라 1세기 유대교는 율법주의가 아니라 언약에 근거한 은혜의 종교였고, 바울이 비판한 율법의 행위는 이방인과 차별화되는 유대적 특권의식을 표징 하는 행위를 뜻한다고 본다.
라이트는 바울이 전한 복음의 핵심의 해석의 틀이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성이라는 관점이라고 주장한다. 구약, 제2 성전 시대 유대교, 바울서신 전체의 큰 물결이 하나님의 언약이고, 하나님의 의는 언약을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하시고야 마는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성이라는 것이다(구약적 증거에 가장 충실한 정의). 바울이 로마서나 갈라디아서에서 하나님의 의 라고 할 때 이런 의미를 염두에 두었다고 라이트는 확신한다. 이스라엘의 언약적 불성실로 인한 율법의 저주를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적 죽음을 통하여 제거하셨고, 이스라엘을 통해 모든 민족을 축복하시려는 언약을 마침내 성취하셨다는 맥락에서 로마서가 전개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라이트는 전통적 가르침은 언약의 맥락에서 바울의 칭의론을 해석하는데 실패했다고 비판한다. 라이트는 이런 비판을 받아야 할 대상은 언약적 율법주의와 감사의 원리로 율법의 유용성을 강조하는 칼뱅주의보다는 루터주의라는 점을 짚고 넘어간다.
바울의 칭의론은 필히 아브라함과 그 후손, 이스라엘을 통해 온 세상을 축복하려는 하나님의 단일한 계획, 즉 언약을 끝내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성의 맥락에서 해석해야 하며, 그 의 즉 신실함이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경이로운 방식으로 확정되었다는 기독론의 관점에서 탐구되어야 한다. 라이트는 로마서 전체 흐름을 이렇게 언약적 신실성이라는 맥락으로 시종일관 주해한다. 로마서에서 바울이 전한 복음은 개인의 구원과 칭의가 아니라 이스라엘을 통해 전 세계를 축복하시려는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을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놀라운 방식으로 성취하신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성, 즉 하나님의 의의 나타남이다. 즉 라이트는 칭의 자체는 바울의 복음이 아니고 그 복음에 내포된 일면일 뿐이다. 모든 인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에서 오는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것은 바울의 복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라이트는 바울이 전한 복음의 핵심 메시지는 예수 그리스도가 죽음과 부활을 통해 주(主)이며 왕이 되셨고 동시에 하나님께서 그를 통해 언약을 성취하심으로 언약적 신실성, 하나님의 의가 출현했다는 기쁜 소식인 것이다.
바울이 말하는 칭의는 이방 그리스인들에게 율법 의식을 요구하는 유대주의자들 때문에 혼란스러워하는 이들에게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언약 백성에 속했다는 점을 확신시켜 주는 데 필요한 교리였다. 그러므로 칭의는 누가 언약 백성에 속했는지에 대한 하나님의 선언이다. 라이트에게 칭의는 언약 구성원 자격에 관한 문제다. 라이트는 우리에게 전가된 예수 그리스도의 의에 근거하여 의롭다고 칭함을 받는다는 전통 견해는 법적 허구라고 신랄하게 비판하는데 이 점에서 개혁주의 입장과 첨예하게 대립된다. 개혁주의에서 주장하듯이 어떤 의가 전가되는 것도 아니고 로마 가톨릭에서 가르치듯이 의가 주입되는 것도 아니며, 단순한 신분 변화라면 그것은 또 다른 법적 허구 아닌가? 라이트는 칭의가 어떤 의미에서는 분명한 변화를 초래한다고 본다. ‘칭의는 참으로 의, 옳다고 인정받은 신분을 창조한다’ 하나님은 칭의를 선언하고 신분을 실제로 창출해내신다는 것이다. 라이트는 그것이 구속으로 말미암아 값없이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그 말씀의 의미라고 주장한다. ‘옳다’는 판결로 말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판정 안에서 보시고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와 함께 다시 살림을 받은 것으로 보신다. 즉 바울이 말하는 바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근거로 우리도 죄에 대해 죽고 의에 대해 부활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새 생명으로 다시 살아난 것으로 간주하신다는 것이다. 라이트는 의롭다는 선언이 기독론적 바탕 위에 이 종말론적 판결이 선취된다고 본다. 최종 판결은 마지막 날 내려지지만 예수님의 성취로 현재로 앞당겨진다. 부활이 마지막에 일어날 사건이 아닌 이미 일어난 것이다. 예수님에게 내려진 의롭다는 판결이 그와 연합한 모든 사람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야말로 최종 판결이 종말에 앞서 현재 우리에게도 정당하게 선언될 수 있는 근거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죄로부터 자유하고 하나님의 언약 백성의 일원이라는 판결의 기초가 된다는 말이다. 그리고 믿음은 언약 백성의 일원이라는 표식이다. 오직 믿음에 기초하여 내려지는 현재적 칭의와 미래적 칭의는 일치한다고 말한다. 성령의 역사가 최종 칭의의 보증이라고 본다.
바울은 유대적 배타주의에 맞서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고 역설했다. 라이트의 새 관점으로 보면 누가 진정한 언약 백성의 구성원인가, 누가 식탁 교제에 참여할 수 있는가 이것이 갈라디아서의 핵심 쟁점이다, 라이트는 이런 맥락에서 사람이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말씀을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칭의는 누가 그 언약 백성의 일원인지에 대한 판결을 뜻한다고 주장한다.
바울의 관점은 유대적 우월주의뿐만 아니라 복음의 은혜를 대적하는 모든 육신의 행위와 자랑까지 포괄하는 차원으로 확대된다. 라이트는 바울이 의도하는 바는 율법이 정죄나 죄를 드러냄이 아니고, 율법의 문제는 그것이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언약의 성취를 방해하는 데 있다고 말한다. 3:10에서 바울의 의도는 이스라엘 전체가 율법적 언약에 충실하지 못함으로 율법의 저주 아래 놓이게 되었다는 것이다. 라이트가 말하는 율법의 저주는 이스라엘 국가가 유배 상태에 처하게 된 것을 뜻한다. 1세기 유대인들과 바울은 바벨론 포로기가 끝난 이후에도 유배 기간이 계속되고 있다고 보았다. 이스라엘이 여전히 국가적 실패로 임한 저주 아래 있었다는 것이다. 이 저주가 계속되면 온 세상 축복하시려는 하나님 언약은 결코 성취될 수 없다. 메시아의 임무는 이 유배 상태를 종식시키고 아브라함 언약을 성취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저주를 받으셨다는 3:13의 말씀을 해석해야 한다. 라이트는 3:10-13, 2:16 두 구절 다 개인의 구원 문제가 아니라 언약 백성을 정의하느냐의 질문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고 본다. 결국 이 부분에서 바울이 말하는 칭의는 언약 백성의 일원이 누구인지에 대한 선언이며, 믿음은 언약 백성임을 드러내는 표징이다.
라이트는 옛 관점이 여전히 필요하다고 인정하면서도 성경을 곡해했다는 비난도 한다. 그의 논지의 핵심은 옛 관점을 폐기 처분하고 새 관점으로 바울을 읽을 때만 옛 관점이 주장하려던 참된 의미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죽기까지 신실하게 하나님께 순종하심으로써 이스라엘의 불순종이 불러온 율법의 저주와 그 결과로 계속되는 유배 상태를 종식시켰다는 것, 그리고 그로 인해 언약의 축복이 이방인에게까지 미치고 이스라엘 통해 온 세상을 축복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이 실현되었다. 라이트는 그리스도가 율법의 저주 가운데 죽은 것은 우리 대신 율법의 요구를 완전히 이루심으로 우리에게 법적으로 전가해 줄 의로움을 이루시기 위해서였다고 보는 전통적 관점을 비판하고 율법은 완벽한 순종을 요구하며 그 율법을 온전히 지키지 못했을 때는 저주를 받기 때문에 우리가 받아야 할 저주를 그리스도가 대신 담당했다는 견해는 왜곡된 주장이라고 비판한다.
라이트는 전통적인 견해가 바울의 복음을 16세기의 시각으로 곡해했다고 보고 자신의 관점으로 온 세상을 축복하시려는 하나님의 언약이라는 틀 속에서 칭의론의 본래 의미를 드러내려 했지만 구원의 핵심이 모호해졌다. 그의 관점보다는 구원론의 관점에서 출발하면 갈라디아서, 로마서가 전개되는 칭의론의 맥락을 더 잘 파악할 수 있다. 구원론 관점으로 시작하면 라이트의 새 관점 언약이라는 거대한 틀 속의 칭의론이 제자리를 찾을 수 있다.
로마서 2장에서 바울의 강조점은 분명하다. 마지막 심판에서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는 없다는 것이다. 바울이 일관되게 관철하려고 하는 핵심은 유대인도 이방인과 동일하게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며 죄인이라는 사실을 밝힘으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여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결론(3:23~24)에 이르는 것이다. 그럼에도 라이트는 여기에서 바울의 의도가 유대인들의 죄를 밝히는 것이 아닌 그들이 자랑한 것이 율법의 계명을 지킨 것이 아니라 토라를 소유한 것이라는 것이다. 즉 이스라엘을 통해 온 세계를 축복하시려는 언약을 자랑한 것이다. 라이트의 해석을 보면 2:17~24에서 바울은 유대인들의 외식을 뭐라 한 것이 아닌 그들의 자랑에 진심 어린 동의를 표한다. 라이트를 비롯한 새 관점 학파는 1세기 유대교가 언약적 율법주의라는 전제하에 그 외의 기능성을 배제한 채 로마서 본문을 읽는다. 바울의 증언 자체에 일차적 근거를 두면 칭의 논쟁에서 바울이 염두에 둔 대상은 행위에만 근거한 율법주의 거나 아니면 은혜에 근거한 율법주의라고 보기 힘들다. 오히려 그 대상은 선택과 은혜와 특권을 자랑하면서도 율법의 행위에 의존하여 육체의 자랑거리를 만들려는 사람들이었다고 본다. 바울은 할례자나 무 할례자가 동일하게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어 아브라함의 자손이 된다고 했다. 바울의 이신칭의 논의는 이방인과 유대인의 장벽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제거되고 연합하여 아브라함의 가족을 구성한다는 교회론적이고 선교론적 차원으로 연결된다. 동시에 아브라함을 통해 열방을 축복하려는 구약적 약속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는 칭의론의 언약적 관점도 부각된다. 전총적 칭의론은 지나치게 개인 구원이라는 범주로 축소해서 해석해 버리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런 전통에 대한 반발로 칭의론의 핵심을 부수적인 논점으로 보는 것은 바울의 의도를 왜곡하고 본문 자체를 훼손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라이트는 최종 칭의의 근거는 하나님에게서 독립된 인간의 행함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과 그 안에서 궁극적으로 승리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승리를 우리 삶에 적용하려는 성령의 사역에 있다고 역설한다. 라이트는 개혁신학자들이 충분히 삼위일체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라이트의 지적이 근거가 없지는 않지만 심각한 문제도 있다. 라이트는 칭의를 이중적 관점에서 이해한다. 현재적 칭의는 우리가 하나님의 언약 백성의 구성원이라는 인정과 선언이다. 라이트는 언약의 틀에 맞게 해석하려는 시도를 통해 바울의 원래 의도한 칭의의 의미를 변형시켰다. 그러나 라이트가 최종적 칭의를 말할 때는 칭의의 원래 의미로 돌아온다. 그는 바울이 로마서에서 확실하게 칭의를 말한 유일한 본문이 2:1~6이라고 했는데 라이트가 진심으로 믿고 주장하는 유일한 칭의는 성령으로 거듭난 이의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이다. 바울이 8장에서 묘사한 성령을 따라 율법의 요구를 행하는 사람이 바로 2장에서 말한 마지막 심판에서 의롭다 함, 즉 최종 칭의를 받을 사람이라는 주장을 강화한다. 하지만 마지막에 내려질 의롭다는 판결은 행함에 기초한다. 라이트가 아무리 성령론적 관점에서 신자의 행함을 설명할지라도 이런 주장은 신인 협력의 칭의론을 회귀했다는 비난을 면하기 어렵다. 6장에서 바울은 믿음으로 의롭게 된 자는 동시에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과 연합하여 죄에 대해 죽고 의에 대해 살아났다고 증언했다. 라이트의 말대로 이신칭의는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긴밀하게 맞물려 있다. 종교개혁자 칼뱅이 간파했던 진리다. 그리스도 안에서 신자가 의롭다 함을 얻으면 반드시 거룩해진다. 라이트의 해석의 틀도 옛 관점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있다. 옛 관점뿐만 아니라 새 관점까지도 넘어서는 관점으로 나아가야 한다 했다. 지금까지 개혁신학에서는 라이트가 강조하려는 바를 언약 신학, 구속사와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충분히 논의해 왔다. 라이트는 바울이 전한 칭의의 복음도 언약적 율법주의와의 연속선상에서 이해한다.
바울이 전한 칭의의 복음은 구약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그리스도를 통해 계시된 하나님의 의는 구원하는 의인 동시에 심판하는 의이며, 칭의인 동시에 정죄이기도 하다.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의는 온 세상에 하나님의 공의로운 통치를 회복하는 종말론적 구원인 동시에 심판이라는 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통해 이루신 의로움은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오염되고 파괴된 피조 세계를 하나님이 원래 의도하신 샬롬의 상태로 회복하는 하나님의 창조적 행위, 즉 새 창조의 사역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종말론적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구약의 소망을 성취하기 위해 오셨다. 바울의 칭의론도 주님이 전한 하나님 나라의 복음과 맥을 같이한다. 이방 선교의 사도로 부름 받은 바울에게 칭의는 그가 전한 복음의 핵심 메시지이다. 바울은 특정한 율법 의식을 언약 백성의 표지로 내세우는 유대인들의 민족적 배타주의, 율법 조항 준수로 의롭다 함을 얻으려는 도덕적 우월주의와 교만을 함께 배격한다. 그래서 시내 산과 예루살렘, 율법과 은혜, 종과 자유자, 사라와 하갈의 비유를 통해 육신을 따르는 행위와 성령을 따르는 믿음의 길을 날카롭게 대립시켰다. 인간의 죄성으로 인해 주님 안에서 값없이 주어지는 복음이 변질될까 봐 칭의의 진리를 선포한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의는 단순히 언약적 신실성이라는 개념으로 축소할 수 없고 더 포괄적인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하나님의 의는 모든 믿는 자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에 근거하고 부활로 완성한다.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고 바울도 말하지만 성화에서 영화에 이르는 구원의 전 과정에 걸쳐 펼쳐지는 칭의의 당연한 귀결이자 산물이다. 그러므로 신자의 거룩한 삶과 행실은 최종 칭의의 근거가 아니다. 이미 내려진 칭의의 믿음이 참되다는 증거인 것이다. 바울이 전한 칭의는 개인의 구원을 넘어서 하나님 나라를 포괄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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