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믿음은 세계관의 전쟁이다
복음은 듣는 사람들에게 배척하든 믿음으로 살아가든 행동을 요구한다. 믿음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자신이 믿는 근본적인 신념을 삶의 전반에 적용하고 실천하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하지만 믿음으로 살아가기로 후자를 결심하는 순간부터 자신의 삶을 총체적으로 변화시켜야 하는 전쟁이 시작된다. 그리고 여론에 의하여 흔들어질 때에 믿는 신념을 포기할지, 내가 믿는 복음으로 세상을 변화시킬지 선택을 강요받는다. 성경의 한 예를 보자. 루스드라에서 바울과 바나바가 복음을 전하다가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는 한 사람을 일으키는 기적을 행한다. 루스드라 사람들은 미신적인 경향이 강하다 보니 바울과 바나바를 신으로 인식하거나 자신들의 종교적인 관점에서 해석한다. 바울과 바나바는 자신들은 사람이라는 것과 기적은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옷을 찢고 소리 지르며 강력히 설명한다. 우리는 자신의 관점에서 해석하고 그 해석에 따라 행동의 변화를 가져온다. 복음에 대하여도 그렇다. 바울과 바나바가 루스드라에서 복음을 전한 것은 우상숭배를 버리고 하나님께 돌아오라는 것과 동시에 이런 그들만의 관점과 해석 즉 총체적인 세계관의 변화를 요구한 것이다. 인간의 노력으로는 그 변화는 불가능하지만 그런 노력 위에 성령이 역사하여야 세계관의 변화가 일어난다. 이처럼 세계관의 전쟁은 성령의 능력에 호소하여 성령과 함께하는 영적인 전쟁이다. 이 전쟁의 전투요원이 청지기이며 청지기의 삶이 세계관의 전쟁을 수행하는 영적 전쟁 자체이다. 그리고 청지기에게 주어지는 자질은 하나님의 주권 안에서 인간의 책임과 의무를 다하고, 그에 맞는 경건의 삶을 사는 것이다.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으면, 믿음으로 살아가고 자하는 갈망이 생길 수밖에 없다. 새 생명을 얻고, 성령 하나님께서 내주 하시기 때문이다. 그런 갈망을 가지나 육신은 그 갈망대로 하고 싶은 것을 하지 못하게 한다. 믿는 그 순간부터 끊임없이 육신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 안에서 갈등하는 것이다. 본 책은 이 갈등뿐만 아니라 의지와 상관없이 우리를 외부에서 흔들어오는 여론의 상황까지 제시한다. 그리고 이 영적 전쟁을 바르게 치를 수 있도록 성경적 세계관의 관점에서의 하나님의 주권, 청지기의 사명을 제안하며 1장을 마무리한다. 1장에서는 ‘우리 자신의 관점에서 해석하고 그 해석에 따라 행동이 따라오는 것으로 복음에 대하여도 그러함’을 말하고, 미신적인 경향이 강한 지역에서 자라온 루스드라 사람들이 바울과 바나바가 행한 기적으로 인해 그들을 신으로 인식하고 자신들의 종교적인 관점으로 해석하여 그 관점대로 바울과 바나바에게 종교적인 행위를 하려 한 이야기가 나온다. 루스드라 사람들이 이해하고 믿는 복음은 바울이 전한 복음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세계관이 바뀌지 않으면 복음을 믿는다 하더라도 왜곡시켜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한 예였다. 이 사실에 매우 동의한다. 하지만 이 세계관의 변화가 인간의 노력으로는 불가능하지만 인간의 노력 없이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저자의 말에는 갸우뚱하다. 바울과 바나바가 무리 가운데로 뛰어 들어가서 소리치는 노력이 있어야 하고, 옷을 찢는 간절함이 있어야 한다며 그런 노력 위에 성령이 역사하여야 세계관의 변화가 가능하다는 것이 저자의 이야기다. 노력이라는 것은 순종을 표현한 단어일까? 책을 전부 읽어봐야 알 것이다. 성경적 세계관이 깊이 형성되기까지 삶의 전반에 육신의 습관대로 이루어지는 해석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복음을 성령님의 일하심 속에서 온전히 해석하는 일들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한다. 그 과정 속에서 성경이 요구하는 삶을 내 힘으로 도저히 살아낼 수 없음을 처절히 경험하며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하게 된다. 그리고 성령님은 생활 속 여러 선택의 기로에서 진짜 하고 싶은 것을 깨닫고 기쁨으로 기꺼이 선택하게 하신다. 이것이 순종이고 이 순종으로 성경적 세계관대로 살아가게 되는 것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생각해본다. 그리고 세상은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자리에서 주시는 마음대로 순종하여 ‘하나님의 큰 계획 속에 있는 세상에서 하나님 뜻대로 쓰임 받자’가 독자의 작은 견해이다.
2장: 세계관은 생각의 틀이다
세계관은 사물을 보고, 듣고, 생각하는 틀이다. 그래서 학문적 훈련이나 이론적 설명과 관계없이 일상적인 삶의 영역에서 항상 작동한다. 무엇을 보든지 내 안에 내재되어 있는 세계관이 작동하여 사물을 해석하기 때문에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또한 동일한 사물을 보아도, 생각하는 틀이 다르면, 나타나는 행동은 다를 수밖에 없다. 즉, 세계관의 틀이 다르면 같은 사물을 보고 들어도 행동하는 양식이 달라지는 것이다. 다른 면에서는 세계관을 ‘안경’에 비유하여 설명할 수 있다. 같은 환경, 같은 장소에서 보더라도 무엇을 통해서 보느냐에 따라서 보이는 것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성경적 세계관은 성경에 의해서 형성되고 점검된 세상을 보고, 듣고, 생각하는 틀이다. 삶의 전 영역에서 성경에 순종하고자 하는 열망을 가진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삶의 틀이며, 그들이 가지고 있는 마음의 안경이다. 세계관의 철학적 개념은 1790년에 칸트에 의해서 세상의 감각적 인식의 의미로 사용되다가 독일 관념론 철학과 낭만주의 전통을 거치면서 지성적인 영역의 특별한 의미를 가진 단어로 발전했다. 독일 철학자 헤겔은 역사의 발전 과정에서 절대정신의 자기 인식의 결과물을 세계관으로 본다. 키에르케고즈는 세계관의 개념을 설정함에 있어서 헤겔의 추상적인 개념보다는 삶의 실존적인 방향성을 더 선호했다. 모든 것을 이해하는 열쇠, 혹은 틀을 제공하는 것을 인생관이고 인간 존재 중심이라 설명했다. 달타이는 세계관을 역사적으로 생성된 실체에 대한 관점들이라고 설명한다. 인간 영혼의 구성요소들로부터 나온다고 봤고,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라고 주장한다. 니체는 실체와 삶의 기복적 개념에 대한 하나의 관점이라는 좀 더 일상적인 방법으로 정의하였다.
세계관은 역사적 과정의 산물이며 외부적인 영향에 의해서 내적으로 변화될 수 있는 유동적인 것이다. 집단적 동질성과 개별적 다양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각각의 민족이 특정한 역사적, 문학적 경험을 공유하여 민족적 공통성을 가진 것처럼 강력한 집단적 동질성을 가지고 있다. 또한 그 안에서도 개인에 따라서 대단히 다양한 특성을 가진다. 니체는 이 개체적 다양성을 관점주의로 설명하였다. 실례로 관심 있는 것만 보이는 것, 아는 만큼 보이는 것, 마음의 동기가 보고 듣는 것의 의미와 해석을 결정하는 것, 드라마나 티브이를 보고 5년 뒤 삶의 현장에 비슷한 현상이 나타나듯 보고 듣는 것이 우리 안에 있는 세계관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고정되지 않고 유동적인 세계관 속에서 복음화냐, 세속화냐 이것은 결국 세계관의 전쟁이다. 거듭남은 세계관의 변화이다. 무엇이 우리의 눈과 귀를 장악하고 있는가, 기독교 세계관은 정말 중요하다.
논리적인 설명에 설득이 되었다. 성경적인 세계관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다시금 생각해본다. 세계관이 유동적이라는 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나’라는 한 사람이 어떤 세계관을 형성하느냐도 매우 중요하다. 세계관의 이해가 없이 복음을 전하고 양육 해갈 수 없을 것 같다. 책의 제목과 같다. 하나님이 없는 타락한 세상 속에서 성경적인 가치관을 적용하고 실천하며 살아가는 영성 훈련. 꼭꼭 씹어먹도록 다음 장들도 이런 과제가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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